삼척 천은사· | ||||||||||||||||||||||||||||||||||||||||||||||||
50번 거슬러 오른 정상서 민족의 역사 풀어놓다 동안 이승휴 선생 민족 대서사시 ‘제왕운기’ 집필 파직 후 터잡고 중국·고려 역사 운율시 형태 기록 | ||||||||||||||||||||||||||||||||||||||||||||||||
일주문 우츨편에 계곡물이 내리는 비에 비례되어 세차게 흐르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절 가까이 비가내리자 함께 떨어진 낙엽들이 장관이네요 보기가 좋아 발을 딛지는 못하고 멀리서 담았습니다
사찰에서 제일 우선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를 하고 구경을 해야죠 마당 가운데 탑과 범 종각
대웅전벽체에 십우도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한다. 악기분류상으로는 혁부(革部)에 드는 타악기의 하나이나 주로 불교의식에서 쓰인 데서 법고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법고의 우측편에 걸린 것은 운판이라 하며 범종·법고·목어와 함께 불음(佛音)을 전하는 불전사물(佛殿四物)의 하나에 속하며 대판(大版)이라고도 한다.
법고 좌측에 목어는 나무를 깍아 잉어 모양으로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낸것으로 불사에 사용되는 법구의 일종이다. 사찰 아래 편에 해우소
| ||||||||||||||||||||||||||||||||||||||||||||||||
아래의 안내문은 강원일보에서 발채한 내용입니다 | ||||||||||||||||||||||||||||||||||||||||||||||||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서 바다가 아닌 강을 끼고 있는 유일한 누각이다. 맑은 오십천을 끼고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죽서루는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함께 죽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 <동안거사집>으로 보아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이다. 천은사를 가기 위해서는 이곳 죽서루에서 지방도를 타고 오십천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십천은 도계읍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동해에 이르기까지 50여 번을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로면 사둔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두타산이 검푸른 머리를 내밀고 내방객을 맡는다. 한적한 시골길 옆에는 푸른 보리가 붉은 황토밭에 누워 조용히 겨울을 견뎌내고 있다. 두타산 초입 천은사와 삼화사로 갈라지는 길목에 천은사기실비(天恩寺記實碑)가 있다. 1921년 한영(漢永)이 글을 짓고, 심지황(沈之潢)이 글씨를 써서 세운 비석으로, 천은사의 연혁을 담고 있다.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과 이어진 쉰움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천은사. 일주문을 지나면 첩첩 산중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벚나무, 꿀참나무, 느티나무 등의 키 큰 노거수들이 산사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호위하고 있다. 이 오솔길은 경내를 흐르는 용계를 몇 번 뒤척이며 내방객을 고려의 역사와 만나게 한다. 이곳이 바로 우리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가 탄생한 ‘이승휴 유허지’이다. ■ 동안 이승휴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천년의 정원 경내 입구 불이교를 건너면 동안사(動安祠)가 있다. 동안사는 천은사에서 동안 이승휴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이승휴는 관직에서 파직되자 삼척의 구동으로 내려와 집을 짓고 당호를 용안당(容安堂)이라 칭한다. 이곳에서 이승휴는 정원을 가꾸고 불경을 읽으며 <제왕운기>를 집필하였다. 마당에서 솟아나는 표음정(瓢飮渟)이라는 샘물 위의 보광정(보光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 화초를 심었다. 보광정 아래쪽에는 사각형의 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고 지락당(知樂塘)이라(<동안거사집>의 ‘보광정기’에 기록) 불렀으니 이는 세상에 나서지 않고 유유자적한 삶을 영위하고자 함이었으리라. 지락당 뒤편에는 복원한 굴피로 지붕을 한 원뿔모양의 통방아 3기가 그 기능을 잃은 채 서 있고 정원 한곳에 중간에 구멍이 뚫린 커다란 방아돌이 놓여 있다. 이 구멍 난 방아돌은 표음정 테두리 돌 중 하나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누런 이끼만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며 역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삼척시립박물관 김태수 관장은 이승휴 유허지를 복원하는데 가능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고려시대 정원의 원형을 되살리는데 주력했다고 한다.
■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실천적 지식인 동안 선생 겨울에 찾아서일까, 정원에는 세월의 무상함이 묻어 있다. 곳곳에 까치밥으로 남겨 두었던 감이 떨어져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땅바닥에 방치된 모습이 시리게 와 닿는다. 몽고의 말발굽 아래 휩쓸리고 원의 간섭으로 한없이 무능한 고려조정과 부패한 관리들에 맞서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이곳에 돌아와 화초를 키우며 불경을 읽었을 이승휴. 하지만 정원 가꾸기와 신앙생활에 숨어들어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실천적 지식인이었고, 역사를 내다보는 선지자적인 지식인이었다. 민족의 자주의식 고취와 군왕이 올바른 통치를 위해 이승휴는 이곳에서 <제왕운기>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정원을 걷는 내방객에게 이승휴 선생은 남북의 허리가 분단 조국에서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발해의 역사와 민족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지고 있는 듯하다. 정원은 윗부분 범종각부터는 본격적인 신앙의 도량(道場)이다. 영월루(보광정) 누각 밑을 지나면 아미타불을 모신 중심법당인 극락보전이다. 아담한 사찰 마당에 우뚝 솟은 오층석탑이 조금 부담스럽지만 여느 산사보다 단아함이 묻어난다. 극락보전 좌우로 설선당과 약사전 등 요사채들을 배치하고 극락보전 뒤로는 삼성각이 있다. 주지스님 거처인 용안당 건물 뒤편의 산경사면에는 청자 가마터가 있다. 가마의 원형은 대부분 상실되었지만 강원도 지방에서 확인된 최초의 청자 가마터로 사료적인 가치가 있다고 한다. ■ 발해를 우리 역사로 편입한 최초의 역사서 제왕운기
두 번에 걸친 원나라 사행(使行)은 이승휴의 국제 정세에 대한 정확한 안목을 갖게 하였다. 원나라의 강성한 국력을 직접 확인함으로써, 원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질서 속에서 고려의 독립과 민족 자주성을 확보한 왕조가 유지 존속할 수 있는 방안을 강조하였다. 이승휴의 정치철학과 사상은 <제왕운기(帝王韻紀)> 집필을 통해 궁극으로 드러난다. <제왕운기>는 중국사를 기록한 상권과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하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휴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역사의 정통성을 정립함으로써 고려가 중국과는 구분되는 독립국가임을 천명하고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였다. 특히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서 최초로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시킴으로써 북방 고토에 대한 회복의지를 제시하였다. 또한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의 공세에 대처할 수 있는 역사적인 근거 자료가 되고 있다. 영사시(詠史詩) 형태로 쓰여진 <제왕운기>는 우리 민족사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족 대서사시로서 이규보의 <동명왕편>의 전통을 잇고, 조선개국 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창작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 국문학사에 우뚝한 봉우리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늘의 은혜 입은 사찰 ‘천은사’ ‘목조아미타삼존불’ 고려후기 양식으로 가치 높아 ■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천은사 신라 경덕왕 17년(758년), 서국에서 건너온 두타삼선(頭陀三仙)이 산의 세 곳에 연꽃(蓮花)으로 표식을 남겼는데, 이 표식을 좇아 남쪽에는 금련대(金蓮臺/현 영은사), 북쪽에는 흑련대(黑蓮臺/현 삼화사), 서쪽에는 지금의 천은사인 백련대(白蓮臺)를 건립하지만, 백련대가 온전한 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범일국사가 극락보전을 중창하면서부터이다. 고려 충렬왕 때, 동안 이승휴가 이곳 용안당에서 대장경을 다 읽었다는 뜻으로 백련대를 간장사(看藏寺 1304년)라 바꾸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 선조 31년인 1598년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중건할 때, 절의 남서쪽에 있는 봉우리가 검푸르다고 해서 흑악사(黑岳寺)로 이름을 바꾸고, 1899년 태조의 5대조인 양무장군의 능(준경묘)을 만들고 이 절을 원당사찰로 삼았는데, 이때 ‘하늘의 은혜를 입었다’는 의미로 천은사로 바꾼 것이 지금의 천은사로 불리게 되었다. 천은사는 1948년 화재로 전소되고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76년 주지로 부임한 일봉 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동안 이승휴의 사당인 동안사(動安祠)를 건립하고 1979년부터 매년 선생을 기리기 위한 다례제를 올리고 있다. ■ 고려후기의 단아양식의 삼존불이 가치 높아 천은사에는 극락보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삼존불과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소형금동불이 있다. 금동약사여래입상은 1985년 천은사 경내에서 출토된 소형금동불로 불신(佛身) 10㎝, 대좌(臺座) 4㎝, 불상의 전체 길이는 14㎝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양식을 계승한 유물로서 신체와 대좌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있고 인체 표현이 섬세하다. 도금을 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박탈되고, 흔적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긴 세월이 흘러 불상의 마모는 심하지만 아름답고 단정하며 생명력 넘치는 조상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양식의 절정기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 불상을 근래에 더 크게 모방, 조성하여 천은사 경내 약사전에 봉안하였다. 극락보전 안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협시하고 있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불신(佛身) 높이 약 100㎝, 무릎 폭 약 74㎝로 두부와 상체, 하체간의 비례가 조화롭다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 제작된 고려후기 단아양식의 삼존불은 학계에서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2006년 12월 14일 천은사 아미타불의 복장(腹藏 불상을 조성하면서 배 안에 봉안(奉安)하는 사리(舍利)와 여러 가지 유물을 일컫는 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천은사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불의 복장(腹藏) 내에서 다량의 유물이 발견되어 천은사와 당시 영동지방의 불교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한다.
[동안 이승휴 선생 생애] 현실과 타협 않고 부정에 맞선 강인한 선비 41세 조정 출사… 군왕 신랄 비판 파직 외가인 삼척서 ‘제왕운기’‘빈왕록’ 집필 ■ 외가가 있는 삼척과의 인연 호는 동안(動安), 자는 휴휴(休休)인 이승휴. 고려 고종 11년인 1224년 경산도 경산에서 태어나, 9세에 책읽기를 시작하였다. 14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외가인 삼척에서 거주하면서 강원도와 인연을 맺었다. 2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어머니가 계신 삼척으로 금의환향하였으나, 몽고의 5차 침입으로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삼척의 요전산성(蓼田山城)에서 몽고군에 항쟁하였다. 그 후 두타산의 구동(龜洞/현 천은사지)으로 들어와 하인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관직으로 나간 때는 그의 나이 41세인 1264년 원종 5년. 불혹이 지나 조정에 출사하였지만 이승휴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올곧고 강직한 선비였다. 관리들의 부정과 비리와 맞서고 군왕에게 신랄한 상소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 민족의 주체성과 자존심을 앞세운 이승휴 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그해에 이승휴 선생의 굳은 지조와 탁월한 문장으로 원나라 사행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이승휴의 식견을 더욱 넓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사행에서 이승휴는 원종의 부음을 전하고, 원나라에 있던 세자가 고려식 상복을 입고 상을 치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민족의 주체성과 자존심을 살린 중요한 일일뿐 아니라 추후 고려 왕실이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관례가 되었다. 원나라에 가 있던 세자가 고려의 국왕으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충렬왕. 이승휴는 유능하고 청렴하여 신임을 받았으나, 지나치리만큼 올곧은 업무처리와 직설적인 상소로 인해 동주(東州;지금의 철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이때부터 이승휴는 스스로 동안거사(動安居士)라 일컫는다. 얼마 후 관리의 감찰을 맡는 전중시사(殿中侍史)로 다시 임명되지만 자신을 총애하는 왕을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거침없이 비판하다 1280년 충렬왕 6년 결국 파면을 당하게 되었다. ■ 제왕운기와 빈왕록을 집필하다 세상을 개혁하려던 소신이 현실의 벽에 부딪힌 이승휴는 삼척의 구동(龜洞)으로 돌아와 집을 짓고 용안당(容安堂)이라는 당호(堂號)를 붙인다. 이곳은 병든 어머님께 몸소 약을 달이고 병간호를 하던 곳이다. 이승휴는 10년 동안 두타산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삼화사를 왕래하면서 천(千) 상자의 대장경을 빌려 읽으며 민족의 대서사시 <제왕운기/1287년>를 집필하고, 1290년에는 <빈왕록>을 집필한다. <빈왕록>은 서장관으로 원나라 사행을 다녀온 기록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신의 기행문이다. 그의 나이 71세, 1294년 충렬왕 20년 되던 해에 용안당을 간장암(看藏庵)으로 개칭하여 스님에게 희사한다. 새로이 즉위한 충선왕(忠宣王)의 간곡한 부름으로 한때 고위관직에서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노년의 이승휴는 거듭 물러나기를 요청하여 이곳으로 돌아와 2년 후인 77세로 생을 마쳤다.
조선 개국 예언한 최고의 명당 태조 5대조 양무장군의 ‘준경묘’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자리하고 있는 준경묘. 풍수상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는 이곳은 조선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다. 고종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고 조선 왕실은 17㎞ 거리에 있는 흑악사를 원당사찰로 지정하여 천은사라는 사명으로 개명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 묘는 조선 개국을 예언한 전설로 유명하다.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목조)가 터전이던 전주에서 상관과의 불화로 이곳 삼척으로 피난을 왔다. 삼척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친 이양무는 별세하게 되자 명당을 찾아 헤매던 이안사는 우연히 ‘이곳에 장사지내면 5대 안에 왕이 태어날 자리인데 반드시 개토제(開土祭) 때 100마리 소(百牛)를 제물로 바치고, 금으로 만든 관(金棺)을 사용해야 한다’는 스님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자 이안사는 궁리 끝에 흰 소(白牛)를 가져오고 금빛의 귀릿단으로 관(金棺)을 만들어 장사를 지낸다. 100마리의 소 대신에 흰 소(白牛)를, 금으로 만든 관은 황금빛이 나는 귀릿짚으로 대체한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장사를 지낸 후 이안사는 또 다시 함흥 땅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지만 예언대로 5대째인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게 되었다. 활기리에서 준경묘로 가는 초입은 가파른 산길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무렵 탁 트인 평지가 나타나고 아름다운 금강송 숲길이 시작된다. 수령 백년이 넘는 소나무 자연림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다. 20m가 넘는 하늘로 곧게 쭉쭉 뻗은 금강송이 뿜어내는 솔 향은 몸과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속이 누렇고 단단해 황장목이라 하는 금강송은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용 목재로 경복궁 중수와 남대문(숭례문) 복원 때 지주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준경묘는 산 정상 가까운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주위에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 바람도 쉬어가고 구름도 자고 갈 마음이 생길 만큼 평화롭고 평안하다.
김대수 삼척시장은 “삼척에 천은사와 이승휴 선생의 유허지가 있다는 것은 우리 삼척시민의 자긍심이자 긍지”라며 “삼척시에서는 동안 이승휴의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계승하여 삼척과 강원도를 대표하는 역사인물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선양사업을 추진해 나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대수 삼척시장으로부터 천은사의 복원 및 가치제고 방안, 이승휴 선생의 선양사업 등에 대해 들어봤다. “이승휴 사상 선양 역사문화·관광 테마 패키지 개발” -삼척시와 삼척시민들에게 있어 이승휴 선생과 천은사가 갖고 있는 역사·문화적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전통사찰 천은사의 발굴복원 및 관리보존 방안은. “천은사는 전통사찰로서보다는 현재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제421호로 지정된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 차원에서 정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한 통방아, 연지 등 유적의 복원이 이미 이루어졌고, 이와 동시에 ‘삼척 두타산 이승휴 유허’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복원 정비를 위한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문화재청과 협의중에 있으며, 문화재청의 승인 후 용안당 등 유적의 연차적 복원을 진행할 예정이다. ” -이승휴의 민족혼이 서려 있는 천은사의 문화재적 가치제고 방안 및 선양사업 계획은. “동안 이승휴 선생과 관련된 유물, 유적 등 보수정비 사업은 종합정비 기본계획에 반영하여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은 후 추진할 예정이다. 매년 10월 3일에 거행되는 동안 이승휴 선생 추모 동안대제를 비롯한 여러 부대행사와 관련 책자 간행, 강연회 등을 통해 이승휴 사상을 선양하고 ‘이승휴 선양사업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선양사업을 발굴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
'건강&먹거리여행 > 이곳에가보셨습니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는 확실 한 우리 땅 대마도도 명확 한 우리 땅 (0) | 2012.08.10 |
---|---|
산청 청계리 현지 답사 후 들린 고담난야 명상수련원 (0) | 2012.03.23 |
4대강 사업 창녕 함안보 개방 행사 (0) | 2011.10.29 |
마산 국화축제 전야제 불꽃놀이 (0) | 2011.10.27 |
마산 국화축제 불꽃놀이 (0) | 2011.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