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트(Ghent), 여유와 낭만이 가득한 수로형 중세도시
생미셸 다리에서 바라본 헨트의 수로와 인근 풍경.
보름 동안의 벨지움 여행에서 당신은 어디를 가장 추천하고 싶은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헨트(인구 22만 명)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 벨지움에는 EU의 수도라고 불리는 브뤼셀도 있고,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부르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나는 그런 너무 유명하고 번잡한 곳보다는 조용하고도 소담한 곳에 더 끌리는 타입이다. 헨트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건 나만의 취향은 아닌 듯하다. 내가 만난 한국의 한 유학생도 벨지움에서 가장 매력적인 곳이 어디냐고 질문하자, 곧바로 헨트라고 답하는 걸 보았으며, 내가 숱하게 도움을 받았던 다니엘 씨도 ‘헨트’라고 답하는데 채 1초가 걸리지 않았다.
“헨트는 벨지움의 여유와 낭만을 간직한 곳이죠. 브뤼셀은 너무 개발되었고, 부르흐는 관광지가 되어서 사람이 너무 많아요. 여기서 불과 30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네덜란드는 또 너무 단정하고 팍팍하죠. 집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네덜란드의 집들은 작고 딱딱하며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반면, 벨지움의 집들은 자연스럽고 여유있게 뚝뚝 떨어져 있죠.” 다니엘의 설명이다. 그의 말대로 헨트는 느슨하고 헐거운 곳이다.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산만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적막하고, 적당히 외로운 곳이다. 그러나 헨트는 부르흐만큼이나 오래된 수로형 중세도시이면서도 부르흐처럼 관광객을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되는, 좀더 마음 편히 여행할 수 있는 곳이다.
성 바보 성당(왼쪽)과 종탑(오른쪽). 성 바보 성당에서 바라본 종탑(아래).
벨지움의 도시가 다 그렇듯 헨트 또한 성당과 종탑과 광장을 중심으로 도심이 형성돼 있다. 헨트의 중심을 이루는 종탑(Belfry)은 14세기(1314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맨 꼭대기 종루는 나중에 개축한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종탑의 높이는 91미터, 종루에는 53개의 종을 매달아 놓았으며, 첨탑 끝에는 겐트의 감시와 수호를 상징하는 3.5미터에 이르는 황금 독수리상을 얹어 놓았다. 중세시대에는 종탑이란 것이 그 도시의 위상과 번영을 과시하는 상징물이나 다름없었다. 잘 사는 도시일수록 종탑은 더 높고 화려했다. 옛날의 권세란 거창한 형식과 비례했다.
현재 벨지움의 플랑드르 지역에는 아직도 중세의 종탑이 도시마다 남아 있으며, 1999년 유네스코는 이들 도시에 남아 있는 30개의 종탑을 한데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종탑과 붙어 있는 건물은 중세시대 직물업에 종사하던 길드상들이 옷과 옷감을 팔던 의류상점으로, 15세기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나 1903년에야 완공된 것이다. 13세기 이전부터 헨트는 플랑드르(벨지움 북부) 지역의 직물업 중심지였다. 과거 헨트를 감아 흐르는 헬데 강 지류인 리스 강 주변에는 섬유풀이 많이 자라서 그것을 강물에 담갔다가 실을 뽑아 옷을 직조했다고 하며, 부를 가져다 주는 리스 강을 헨트 사람들은 ‘금강’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헨트에서 만난 사람들.
광장을 사이에 두고 종탑과 마주보는 성당이 바로 성 바보 성당(St. Babo's Cathedral)이다. 성당 이름이 바보라니! 웃음부터 난다. 성 바보 성당(82미터)은 10세기에 처음 세워졌으나, 여러 번의 증개축을 거쳐 16세기(1554년)에야 완공된 것으로, 전체적으로 고딕 양식을 띠고 있다. 한국 사람에게는 성당 이름이 ‘바보’여서 눈길을 끌지만, 현지에서는 ‘바프’(Baafskathedraal)라고도 부른다. 저녁이면 바보성당을 중심으로 한 노천 카페들은 멋진 야경을 배경 삼아 손님들을 불러모은다. 하지만 언제나 손님들은 광장보다 좀더 운치가 있는 수로변 카페로 몰려가곤 한다.
흐라벤스틴 고성(위)과 생미셸 다리의 야경(아래).
종탑을 사이에 두고 광장 건너편에 성 바보 성당이 있다면, 종탑의 길 건너편에는 성 니콜라스(St. Nicholas) 성당이 있다. 니콜라스 성당은 13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고딕 양식을 띠고 있으며, 내부의 장식은 바로크 양식이 가미되었다. 이 밖에도 헨트에는 외관이 조화롭고 아름다운 성 야곱(St. Jacob's) 성당과 운하를 앞에 두고 자리한 생미셸(St. Micheal's) 성당이 볼만하다. 니콜라스 성당에서 생미셸 교회로 건너가는 생미셸 다리는 헨트의 수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도 손꼽히는데, 특히 생미셸 다리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헨트 제1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수로변에서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
생미셸 다리를 중심으로 한 수로 주변은 헨트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자 야외 카페와 바, 음식점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기도 하다. 수로를 끼고 자리한 중세풍 집들은 전형적인 플랑드르 가옥들이다. 즉 건물의 상단부를 사다리꼴로 장식한 건물들이 비슷비슷한 높이로 늘어서 있는 것이다. 저녁이 되면 이 곳에는 붐빌 정도는 아닐지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수로변에 나와 저녁의 낭만과 사색을 즐긴다. 연인들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키스를 하거나 껴안고, 아예 자리를 펴고 수로변에 앉아 와인을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이런 풍경은 생미셸 다리에서부터 흐라벤스틴(Gravensteen) 고성까지 수로를 따라 이어진다. 흐라벤스틴 고성은 플랑드르 후작가가 머물던 성이어서 ‘후작성’이라고도 불리는데, 9세기(12세기라고도 함)쯤 성이 구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이 성은 법원과 감옥으로 쓰였고, 방직공장으로도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사형틀이나 감옥, 각종 잔인한 고문기구를 전시한 고문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이 곳에는 불도장 찍기 고문, 나팔관 물고문, 항문고문과 같은 다양한 고문의 종류가 그림과 함께 전시돼 있다. 흐라벤스틴 고성 옆쪽은 트램이 지나는 광장이 들어서 있는데, 이 곳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전통놀이를 즐기거나 소규모 축제를 벌이곤 한다.
도시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조각품(위)과 황혼 무렵의 헨트 시내 풍경(아래).
헨트는 도시 전체가 중세풍 건물로 되어 있으며, 도심 한가운데를 수로가 관통하고 있다. 이 수로는 겐트 인근의 작은 마을까지 방사형으로 뻗어나간다. 심지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데인즈 마을에서도 작은 보트를 타고 헨트까지 와서 저녁을 먹고 가는 사람도 있다. 헨트뿐만이 아니라 벨지움은 나라 전체가 복잡한 수로로 얽히고 설켜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헨트 주변에는 옛날의 화가마을, 베고니아 마을, 타피스트리 마을, 여자들만의 마을이 남아 있고, 아직 그 전통을 이어가는 곳도 있다. 벨지움에서 유난히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간직한 곳도 바로 헨트 인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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