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 전차 모습


1920년대 말, 서울의 상권을 둘러싸고 일본인들과 조선인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때 백화점 유통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박흥식이다.
당시 서울의 상권은 남촌(南村:명동, 충무로)이 중심으로, 남촌의 일본인 백화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남촌과 대조적으로 북촌(北村:종로)의 상권은 부진했으며, 가난한 조선인들을 상대로 근근히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이어가던 조선인의 상권이 위협받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은행 앞에 있는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옛 종로경찰서 자리로 옮겨온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은 종로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과 맞물려 종로상인들만의 백화점 건설사업을 촉발시켰다. 다른 상점들은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두 상점은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던 듯 하다. 그중 하나는 덕원상점을 경영하던 최남이 민규식(閔奎植)과 제휴해서 만든 동아백화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금은방으로 준백화점급이었던 신태화의 화신상회였다.
박흥식이 백화점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원래 박흥식은 선일지물회사라는 종이회사로 발판을 닦았고, 점차 사업을 확장해가면서 재계의 총아로 불리고 있었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에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는 1930년, 무리한 사업확장과 점원들의 파업, 그리고 디플레이션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박흥식은 신태화에게 화신상회를 주식회사로 변경할 것을 요청하였고,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1931년 9월 15일 자본금 100만원의 (주) 화신상회가 설립되었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의 경영실권을 장악하고 화신상회를 구조조정하기 시작했다. 임원과 점원을 “물갈이”하고 건물도 증개축했다. 당시 목조 2층건물이었던 화신상회를 500평 정도의 콘크리트 3층건물로 변신시켰다. 이것이 화신백화점의 시작이다.
비판과 경탄이 교차하는 가운데,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백화점 업계의 후발주자였던 화신이 일본인 백화점들과 경쟁하면서 성공적으로 경영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경기가 활황으로 치달으면서 상업계 전반이 호황을 누린 점에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경영전략상의 배경이 있었다.(오진석. 2002.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동방학지』참조).
첫 번째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박흥식은 화신이 한국인 소유의 유일한 백화점, 즉 ‘민족백화점’임을 강조했을 때 한국인 고객의 상당수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언론매체를 통해 화신백화점이야말로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는 백화점이라고 주장했다. 화신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는가가 한국인 전체의 능력과 위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박흥식이 벌여놓은 규모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와 일본은행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대인들에게 박흥식은 일본 재계가 거의 대부분의 상권을 잡고 있었던 식민지 시기에 성공한 조선인 자본가라는 자부심과 총독부와 일본금융을 등에 업고 성공한 친일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교차하는, “야누스”적 존재였을 것이다.
1920년대 말, 서울의 상권을 둘러싸고 일본인들과 조선인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이때 백화점 유통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박흥식이다.
당시 서울의 상권은 남촌(南村:명동, 충무로)이 중심으로, 남촌의 일본인 백화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남촌과 대조적으로 북촌(北村:종로)의 상권은 부진했으며, 가난한 조선인들을 상대로 근근히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이어가던 조선인의 상권이 위협받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은행 앞에 있는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옛 종로경찰서 자리로 옮겨온다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은 종로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는 위기감과 맞물려 종로상인들만의 백화점 건설사업을 촉발시켰다. 다른 상점들은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두 상점은 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던 듯 하다. 그중 하나는 덕원상점을 경영하던 최남이 민규식(閔奎植)과 제휴해서 만든 동아백화점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금은방으로 준백화점급이었던 신태화의 화신상회였다.
박흥식이 백화점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원래 박흥식은 선일지물회사라는 종이회사로 발판을 닦았고, 점차 사업을 확장해가면서 재계의 총아로 불리고 있었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에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는 1930년, 무리한 사업확장과 점원들의 파업, 그리고 디플레이션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박흥식은 신태화에게 화신상회를 주식회사로 변경할 것을 요청하였고,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1931년 9월 15일 자본금 100만원의 (주) 화신상회가 설립되었다.
박흥식은 화신상회의 경영실권을 장악하고 화신상회를 구조조정하기 시작했다. 임원과 점원을 “물갈이”하고 건물도 증개축했다. 당시 목조 2층건물이었던 화신상회를 500평 정도의 콘크리트 3층건물로 변신시켰다. 이것이 화신백화점의 시작이다.
초반의 화신백화점은 일본인들의 백화점을 상대로 경쟁하지는 않았다. 종로통 화신백화점 바로 옆에 있던 동아백화점과의 경쟁이 우선적으로 발생했다. 화신백화점은 동아백화점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소를 경품으로 내놓는가 하면 10전 염가할인도 불사했다. 동아백화점의 최남 사장은 파고다 공원 서편에서 동아부인상회를 경영하는 등 잡화업계에서는 박흥식보다 앞선 인물이었지만, 일본 오사카 공장에서의 물품 직수입, 상품권 발행, 금전 등록기 설치, 문화주택을 경품으로 주는 대담한 상행위 등 새로운 경영방법을 구사하는 화신상회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승리는 박흥식에게 돌아갔다. 그는 최남의 동아백화점을 인수, 화신백화점을 확장했다. 동아백화점을 인수한 화신은 두 건물 사이에 육교를 가설, 양쪽을 오가면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당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주요한과 소설가 조벽암(趙碧岩)이 화신의 광고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1935년 1월 27일, 목조 4층건물이었던 화신백화점에 큰 화재가 났다. 이 화재로 불타없어진 건물의 연면적은 약 270평, 건물·상품의 손해액은 45만 3천원이었다. 박흥식은 당시 44만원의 보험을 들어 있었기 때문에, 화재는 오히려 쌓여 있던 재고상품을 처리하고 새 창고를 지어 잘 팔리는 상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35년 8월 14일, 반쯤 타버린 화신 동관(東館)을 5층으로 증개축하였고, 1936년 12월 서관(西館) 일부를 개점하고, 조선총독부, 식산은행, 보험회사 등의 도움으로 인접한 대창무역의 부지까지 구입해서 연건평 2천여평이 넘는, 1937년 11월 11일 지하 1층, 지상 6층의 화신백화점 신관을 건설하여 매장확대를 하였다. 화신백화점은 민족백화점의 이름을 내걸고 다른 4개의 백화점들과 본격적인 경쟁에 들어간 것이다.
소비의 시대가 왔다. 눈 깜짝할 사이 신작로가 놓이고 높은 건물들이 갑자기 땅에서 치솟아 오른 1930년대의 서울, 휘황찬란한 것은 밤의 가스등과 네온사인만이 아니었다. 버스와 전차가 달리는 거리, 들어보지도 못한 물건들을 파는 상가, 카페, 우동집, 빙수집, 찻집, 그리고 백화점…….그곳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유유히 걸어가는 모던 보이 모던 걸들…….
비단 스타킹에 서양식 구두, 짧은 치마와 단발머리를 한 모던 걸이 신사복을 빼입은 모던 보이의 팔에 금빛 찬란한 손목시계를 찬 손을 걸친 채 벚꽃놀이를 끝내고 백화점에서 쇼핑과 식사를 한다는, 새로운 행복의 기준이 세워졌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이 모더니즘은 자본과 함께 등장한다. 자본은 신분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의 관대함은 가진 자에게만 부여되는 혜택이었고, 돈을 가진 사람들이 천국을 향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천국은 과거 양반들이 누리던 은밀한 특권과는 달리 대중들 앞에 공개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 관능의 우물이다. 자본의 나라에서 파는 것은 물건이 아닌 “특권”이다. 그것도 매일매일 갱신해야만 하는.
멋진 신사복이나 멋진 구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국의 특권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가 표현하듯이 “파노플리(panoplie)" 즉 세트로 구입해야만 한다. 누구나 다 신사 숙녀가 될 수는 없는 일. 모두가 다 특권을 받을 수 있다면 그곳은 이미 천국이 아니다.
1930년대 중반 화신백화점 점원의 한달 월급은 대략 3십 원. 신사 한명, 숙녀 한명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시 돈으로 4, 5백 원이 필요했다. 4, 5백원은 일반인들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액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누구나 그것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숫자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제 백화점은 모든 것의 의미를 변화시켰다. 사랑, 문명, 지식인의 조건, 문화를 향유한다는 것은 모두 백화점과 연결된 무엇처럼 느껴졌다. 백화점 쇼윈도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사람들은 그 유혹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자신이 누려야만 하는 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사기 위해서 백화점에 오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백화점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며 배우게 된다.
1층에는 상품권과 잡화, 화장품, 약품을 판다. 2층에서 주단 포목과 귀금속, 시계, 안경을 구경하고 3층으로 올라가면 부인복과 아동복, 완구, 수예품을, 4층에는 근사한 신사복과 비싼 만년필과 공책, 서적을 팔고 있다. 이런 다양한 물건들을 우아한 걸음으로 구경하고 나면 어쩐지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어진다. 한 층 위인 5층에는 손님들을 위한 식당부가 마련되어 있다. 가구를 새로 마련하려고 하거나 스포츠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6층으로 가면 된다. 내일 누군가를 만날 일이 있거나 집안에 잔치라도 있는 사람들은 제일 윗층에 있는 미장원에 간다. 혹시 화창한 날 서울의 전경이 보고 싶으면 백화점 옥상으로 가라.
천국을 지상으로 끌어당긴 백화점은 이제 살아있다는 감각 그 자체가 되어 간다.
그는 종로로 발길을 내딛었다. 그렇게 더럽고 보기 싫은 종로거리가 몹시도 번창해보이고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자기의 재생에 대하여 기뻐하는 것 같았다. 색채, 음향! 화신상회의 집보다 더 큰 여름철 “대매출” 광고도 신기하였다. 악기점의 레코-드 소리도 듣기 좋았다. 팔다리를 벌-겋게 드러내고 “캥거루” 걸음을 걷는 신식 여성들. 그 외의 모든 것이 참 아름다워 보였다. 아- 내가 살았기 때문에 저러한 즐거운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보는 대로 만지고도 싶고 덥썩 안고도 싶었다. 즐거운 세상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실로 이 꿈같은 현실에 서서 꿈을 꾸는 이 동안에-그 짧은 시간 안에 그는 과거-병 앓기 전에 모든 사색은 차단된 것이었다. 이 행복한 시간에 그는 인생으로서 참 기쁨을 맛볼 것이다. 그는 백화점 식당에 앉아서 “런취-”를 시켰다.(중략) 그는 이 백화점 식당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옳다- 나도 저들과 같이 이곳에서 밥을 먹게 되었구나 하였다.
(「병실에서 병실에(상)」『인생스케치』제 5경(景). 조선일보 1934. 7.26.)
1910년과 1919년의 ‘경성시구개정’ 계획에 따라 경성은 전혀 다른 면모로 변화했다. 도시중심가로는 직선으로 뻗었고, 육조거리 끝은 광장이 되었으며, 경성역과 광화문 사이에는 직선대로가 건설되었다. 총독부는 문명과 야만의 대비를 통해 조선통치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종로통은 개발하지 않았다. 더러운 거리 북촌과 깨끗한 문명의 거리 남촌의 구분은 결과적으로 상업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진고개 중심의 남촌지역은 화려한 건물이 가득 차 있는 근대도시로 성장했고, 북촌지역은 불완전한 근대, 식민지적 근대도시를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앞으로 이전함으로써 조선을 동화시키겠다는 의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종로를 변화시키게 되었다.
종로통 가로개수는 종로지가상승으로 이어졌다. 1924년 경성부에서 표준지가를 정하는 상등지 표준지는 명치정(明治町), 본정(本町) 등의 남촌지가가 아닌 종로 네거리였다. 당시 종로 네거리의 표준시가는 매평당 1,200엔으로, 1921년 본정 2정목의 표준시가 400엔의 세배가 되었다.
깔끔해진 종로변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20년대 후반경이 되면 동아부인상회와 덕원상회, 유창상회, 김희준 상점, 동양서원 등과 같은 2~3층짜리 신축 상점들이 세워지면서 종로는 이전과 달리 화려한 남촌과 닮아가기 시작했다.
1920년대, 대량생산의 확대는 유통업의 발전을 요구하게 된다. 백화점은 대량유통의 발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형유통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백화점시대는 일본식 백화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오복점(吳服店)들이 대형백화점으로 전환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1904년경에 서울에 진출한 히라다(平田)상점은 1926년 주식회사로 변경하면서 히라다 백화점을 만들었다. 히라다 상점과 같은 해 서울에 개점한 조지야(丁字屋)도 1921년 주식회사로 전환한 후 1929년 9월 남대문로(현재 롯데백화점 영플라자)에 본점을 증축하고 백화점을 개업했다. 1905년 대구에서 시작, 1911년 충무로에 들어온 미나카이(三中井) 역시 1922년 미나카이 오복점에서 주식회사로 변경하고 1929년 조직을 증축했다. 미쓰코시도 다른 상점들과 마찬가지로 1906년 서울에 임시출장소를 마련해서 영업하다가 1916년 르네상스식 3층 건물을 짓고 1925년에 건물을 증축했다. 그리고 1930년 10월, 충무로 입구(현 신세계백화점)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신관을 건립했다.
1930년대 초, 북촌에도 백화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최남은 종로 2정목 5번지에 지하 1층, 지상 4층(총건평 508평)의 동아백화점을 세우고 1932년 1월 4일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이어 박흥식도 1932년 5월 10일, 화신백화점을 시작했다.
백화점이 들어서게 된 북촌은 이제 거리의 풍경만 남촌과 닮게 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상점들은 더 이상 옛날과 같은 형태로 물건을 매매해서는 일본인들의 상점과 대항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북촌과 남촌은 취급상품과 거래형태, 유통구조면까지 유사해지기 시작했다. 북촌과 남촌의 대립으로 인식되던 경제의 경쟁구도는 이제 백화점과 소상인들의 대립으로 변해갔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인구가 30만에 불과한 서울에 백화점은 북촌에 화신, 남촌에 미쓰코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다 다섯 개나 되었다. 당시 경영부진으로 동아백화점을 화신에 넘겨주어야 했던 최남은 백화점의 증가가 소매상과 백화점 양쪽에 다 좋지 않다고 비판했다.
최남은 동아백화점을 경영하던 시기에 연구차 동경과 오사카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백화점이 8개, 상주인구는 300만, 유동인구가 100만이었다. 동경의 경우 고정인구 400만에 유동인구 200만이었다. 오사카에는 백화점이 여덟 군데, 동경에는 아홉 개가 있었다. 서울 상주인구 30만에 백화점 5개는 너무 많다고 한 최남의 지적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은 유통업에 큰 타격이 되었다. 동아시아의 유통업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상해에서 문을 닫은 백화점은 1930년대 초반 세 곳이나 되었다.
경제가 발달한 미국이나 일본, 상해 같은 곳에서도 백화점이 폭리를 남기지 못하는 상황인데, 서울처럼 아직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곳에서 백화점이 잘 될 리 없다. 그러나 백화점이 호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백화점의 존재는 소상인들을 위협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소매상과 백화점은 유통구조와 판매방식이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최남은 백화점을 두고 본래의 목적에 맞게 폭리를 취하지도 못하면서 소상인들의 이익을 잠식하는 두통거리로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화점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인구 15만인 평양에 조지야, 미나카이, 김응수의 평안백화점이 있었고, 부산이나 10만이 겨우 될까 말까한 대구, 목포, 흥남, 군산, 광주, 대전에도 미나카이나 조지야가 진출해 있었다. 소매상으로 그다지 큰 이익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4, 5만정도 되는 도시를 찾아 백화점을 만들려고 몰려가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박흥식의 “1천개 화신 연쇄점” 계획은 이러한 경제적 혼돈 속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남대문통 화강석으로 화려하게 솟아 있는 조선은행 총재실에 이십 칠,팔세 정도 밖에 안되어 보이는 어린 조선인 청년이 은행장을 찾아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사업명세서를 꺼내 은행장에게 보여주었다.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꼭 성공할겁니다.”
은행장은 금테안경 너머로 청년을 한번 쳐다보고 그가 건네준 종이수입에 대한 명세서를 꼼꼼히 읽었다. 명세서에는 일전 일리까지, 사업의 구체적인 계획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은행장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융자받으러 오는 조선인 사업가 중 이렇게 자세한 사업계획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그는 청년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그는 현실에 대한 치밀한 계산을 기초로 캐나다에서 종이를 수입할 경우 인플레이션으로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그럴듯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사실 국제상식이 약간만 있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이 청년처럼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지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년의 설명을 한참 듣고 있던 은행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책상을 탁 쳤다.
“좋습니다. 5만원까지 빌려드리겠습니다. 잘 운용해서 좋은 성과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청년은 감격했다. 그 길로 캐나다에 전보를 쳐서 신문권지(新聞卷紙) 계약을 맺고 황금정에 선일지물회사(鮮一紙物會社)를 창설하였다. 이 청년이 바로 재계의 총아였던 박흥식이다.
평안도에서 조그마한 인쇄업을 경영하다 생면부지 서울에 올라온 박흥식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신용제일주의”였다. 1925년 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차린 그는 서울에 있는 일본지업회사(日本紙業會社)를 찾아가 몇백 원어치 종이거래를 한 후 동아일보의 김성수 사주(社主)와 송진우 사장을 찾아가 간신히 6개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계약을 맺은 지 6개월 만에 종이 값이 폭등했다. 계약상 금액으로 종이를 공급할 경우 박흥식은 수천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박흥식은 이때 신용 하나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계약을 파기하지 않고 동아일보와의 계약을 준수했고, 여러 신문사들이 "신용을 지키는“ 박흥식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박흥식은 이를 발판으로 선일지물회사를 창립하는 한편 일본계 은행에 신용을 차곡차곡 쌓아갔고, 선일지물회사, 화신, 대동흥업, 화신연쇄점, 화신무역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박흥식의 사업확장은 모두 놀랄만한 것이지만, 전국적으로 화신의 면모를 일신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은 전국의 주요 잡화점을 사실상 화신의 지점으로 하는 연쇄점의 발상이었다. 1930년대 백화점들은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고 상품권을 대량 발행하고 할인대매출을 수시로 실시했다. 이러한 대형유통업체의 확장은 중소상인들의 타격을 가져왔다. 당시 중소상업문제는 식민지체제에 대한 반발로 이어질 우려가 있었으므로 총독부는 백화점의 확장을 규제하고자 했다. 이런 가운데 화신은 당시 중소상업문제의 본질을 일본인 대상업자본과 한국인 중소상업자본간의 문제로 파악 하고 그 대책으로 ‘임의 연쇄점(voluntary store)’ 즉 체인스토어 사업안을 구상했던 것이다.
“체인스토어”라고 불리는 연쇄점은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크고 호화스러운 건물과 분위기로 대도시의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것이 백화점이라면, 연쇄점은 전국의 소비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화신은 석유, 종이부터 식료품, 양품, 잡화, 사기, 철물, 문방구, 수예품, 화장품, 완구, 신, 그리고 오사카에서 수입하는 각종 다양한 물건들을 연쇄점을 통해 판매하고자 했다.
박흥식이 계획한 1천개 연쇄점은 1934년 당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보였다. 연쇄점은 당시 일본에서도 겨우 시작한 것으로 조선에서 성공할 수 있을지가 의문시 되었다. 무엇보다 연쇄점을 열 수 있는 자금이 있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박흥식은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에서 한번에 50만원에서 70만원을 대출받을 수 있을 정도의 신용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한도의 10배가 되는 5백만 원을 빌려야 했다. 이 무모한 계획에 조심스러운 일본은행가들이 동조해줄리 만무했다. 그는 우선 조선은행과 5백만 원 융자를 교섭했다. 5백만 원은 화신 자본금의 5배 이상이 되는 큰 돈이다. 이번만큼은 조선은행이 박흥식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은행에 호소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1천개의 연쇄점부터 먼저 모집했다.
박씨는 다시 전조선적으로 그 상권을 펴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년전부터 일찌기 미국에서 유행하든 「첸스투어」연쇄점 일천점을 계획하야 백방으로 그 자금운동을 하야 처음에는 조선은행에 500만원 융자를 교섭하다 성공하지 못함으로 결국을 고하게 되어 일시는 소식조차 업더니 금년에 들어서며부터 그 소문이 재연하더니 최근에 와서는 그 계획의 검토를 완료하고 전조선 각지에 향하야 연쇄점 지원자 모집을 각신문에 발표하고 그 신청을 받게 되었는데 듣는 바에 의하면 그것에 응모된 사람이 7월 15일까지 3,000을 돌파하였다 한다.
(江村凡夫, 「재계시평 동일은행과 화신」『개벽』신간 제 1호. 1934. 11.1.)
실로 대담한 계획이었다. 제 1기 연쇄점 모집이 어느 정도 열기를 띠자 박흥식은 식산은행으로 갔다. 수차례의 교섭 끝에 융자받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그동안 쌓아온 신용의 결과가 아니었다.
박흥식은 연쇄점을 모집할 때 하나의 단서조항을 덧붙였다. 그것은 연쇄점을 하는 사람이 『상품법내액에 해당할 만한 부동산을 담보로 하라』는 조건이었다. 그는 부동산을 담보로 연쇄점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는 1천명의 부동산담보를 다시 식산은행에 담보로 넘겨주었다. 당시 담보평가는 시가의 6할이나 5할 저도에서 이루어졌다. 1천명의 부동산의 5,6할의 금액이 5백만원일 때 거래가 성사된다는 말이다. 화신은 1천만 원을 호가하는 부동산을 담보로 이 거래를 성사시켰다. 화신은 이 담보로 상품을 구입해 가맹점에게 공급하고 결제는 현금대신 장기어음으로 지불했다. 다시 말하자면 연쇄점 사업은 식은과의 긴밀한 연결이 없고서는 유지가 불가능한 사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흥식이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과 그 성과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조선인”이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사실이 조선인들을 감격시켰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조선인의 땅을 일본에 담보 잡혀서라도 사업을 성사시키고자 하는 박흥식에 대한 동경과 분노가 교차했을 것이다.
한편 중소상인들이 백화점과 경쟁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도 화신연쇄점은 기타 중소상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중소상인들은 백화점 외에 화신연쇄점이라는 또다른 경쟁자를 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전문가들 중 일부는 연쇄점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연쇄점이 성공하기에는 조선경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쇄점에서 파는 상품들은 잡화여야 하는데, 도시화가 되지 않은 여타 지역에서 와이셔츠나 넥타이, 양말 같은 것을 살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고, “놋그릇, 질그릇, 양잿물, 춘향전, 성냥갑, 물감”같은 물건들이나 팔아야 연쇄점이 성공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연쇄점이 이런 시세가 일정하고 누구나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을 취급하게 된다면 중간유통기관을 끼고 있는 연쇄점이 성공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연쇄점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따로 공장을 만들어서 조선에도 일본에도 만들지 않는 독자적인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생산공장을 만들 만한 기술적 능력도, 그런 물건을 살만한 구매력도 조선에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연쇄점보다는 전문상인이 되는 것이 오히려 전망이 있다고 보는 예측도 있었다.
비판과 경탄이 교차하는 가운데,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화신연쇄점은 처음에는 50여개가 개설되었으나 1935년에는 350여개에 이르며 극성을 이뤘다. 연쇄점 사업이 확대되자 1936년 3월, 자본금 200만원(50만원불입)의 화신연쇄점을 설립하여 백화점에서 독립시켰다. 박흥식은 연쇄점 뿐 아니라 평양의 평안백화점을 인수해서 1935년 12월 1일 화신백화점 평양지점으로 개점하는 한편 1938년 6월에는 진남포에 3층짜리 화신백화점 진남포지점을 개설하였다.
다양한 방식으로 경영을 확대해나가던 화신은 빠르게 성장했다. 화신의 매출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영업세 납부액은 1931년 670원에서 1,935년 2,388원, 4,069원으로 증가, 일본인 백화점과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되었다. 매출액증가로 당기이익금도 꾸준히 증가하였고 이를 총자산으로 나눈 총자산수익율이나 자기자본으로 나눈 자기자본수익율도 같은 기간 히라다 백화점을 제외한 일본인 백화점들보다 높았다(오진석. 2002.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동방학지』참조).
백화점 업계의 후발주자였던 화신이 일본인 백화점들과 경쟁하면서 성공적으로 경영을 확대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경기가 활황으로 치달으면서 상업계 전반이 호황을 누린 점에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경영전략상의 배경이 있었다.(오진석. 2002.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동방학지』참조). 첫 번째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박흥식은 화신이 한국인 소유의 유일한 백화점, 즉 ‘민족백화점’임을 강조했을 때 한국인고객의 상당수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언론매체를 통해 화신백화점이야말로 한국인 전체를 대표하는 백화점이라고 주장했다. 화신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는가가 한국인 전체의 능력과 위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박흥식은 사업확장이나 경영위기 때마다 한국인들이 민족백화점인 화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 화신은 일본인 백화점의 “종로진출을 막는 방책”을 다하겠다고 선전하면서 한국인 고객 흡수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화신서무과장 이종건이 서울의 유일한 한국인 백화점인 화신은 그 기반이 “확고부동”하며, 이는 한국인 소비자들의 이해와 신용이 점차 증가하여 “무슨 물건을 사든지 가까운 종로의 화신”으로 오기때문이라고 자랑했던 것은 화신의 이러한 전략이 성공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오진석. 2002.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동방학지』참조) .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박흥식이 벌여놓은 규모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와 일본은행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제사, 조선견직의 경우는 계열은행인 동일은행에서, 경성방직은 해동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지만, 이러한 계열금융기관을 갖고 있지 못했던 화신은 자금조달문제에 매번 부딪치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박흥식은 총독부에 금융지원의 폭을 늘리고 절차를 간소화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일본계 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대인들에게 박흥식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본 재계가 거의 대부분의 상권을 잡고 있었던 식민지 시기에 성공한 조선인 자본가라는 자부심과 총독부와 일본금융을 등에 업고 성공한 친일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교차하는, “야누스”적 존재였을 것이다.
그의 모순은 1930년대 말 전시체제로 들어가면서 더욱 깊어진다. 전시체제 하에서 백화점들은 전쟁물자 보급망으로 기능하게 된다. 1940년 5월 10일, 화신, 미쓰코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다 백화점들은 조선백화점 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박흥식은 이 조합의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한편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이사, 배영(排英)동지회 상담역, 임전보국단 이사, 국민동원총진회 감사, 대화동맹 심의원,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을 역임했다. 박흥식이 일제의 총동원체제 구축과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면서 화신백화점 광고에도 “민족백화점”“조선의 화신” 대신 비행기와 철모를 쓴 군인들이 광고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오진석. 2002. 「일제하 박흥식의 기업가활동과 경영이념」『동방학지』참조).
우리는 여기에서 자본이 어떻게 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아마도 박흥식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 그 자체이지, 자본의 출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인으로, 식민지시기의 제한된 자본의 유통을 풀기 위해서는 일본계은행과 총독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이후 반민특위의 공판에서 박흥식은 “그들(일본인)을 이용하려다가 이용당했다”라고 토로하지만, 당시 자본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이용하는 만큼, 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모순은 황국신민화와 참전을 통해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폭력에 그가 일조해야 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 것이다.
(발췌: 역사로 보는 서울의 공간)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보신각이 45도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근대적 교통수단의 도입에 따라 안전과 시야확보를 위해서 가각(가로 모퉁이 자르기)를 정리하면서 건물을 옮겼기 때문이다. 보신각 옆으로 남대문로가 시작되는 곳에 있었던 육의전 장랑이 있던 곳에는 동일은행이 새롭게 들어서 있다. 동일은행을 지나서 근대적 상업기능을 수용하면서 변화해가는 가로변 한옥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의 오른편에는 현 조흥은행의 전신인 한성은행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사대문 안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의 한 곳인 보신각 네거리의 모습이다. 가로의 바닥이 아스팔트가 아닌 석재로 포장된 것이 이채롭다.

화신백화점은 1937년 11월에 동관 및 서관을 완공하였으며, 박길용에 의해 설계된 한국계 백화점이다. 건물의 규모는 대지 324.8평에 지하 1층 지상 6층의 연건평 2,034.4평의 근대식 상업건축물로 세련되고 개방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외벽은 화강석을 두르고 현관 주위는 대리석으로 꾸며 웅장한 감을 주었다고 한다. 1939년 4월에 화신의 설립자인 박흥식(朴興植)은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화신 뿐만 아니라 화신연쇄점(和信連鎖店) · 선일지물(鮮一紙物) · 대동흥업(大同興業) 등 4개의 사업체를 통합하여 운영하였다.

종로거리에는 전차가 부설되면서 전봇대가 새로운 가로경관의 주된 요소로 등장하고 있음을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진의 왼편에는 전래의 육의전 행랑의 지붕위에 간판이 올라서 있는 모습이 근대 자본주의사회로 진입된 경성의 풍경을 보여준다. 육의전 행랑 뒤편으로 새롭게 건설된 한성전기회사 사옥과 황성 YMCA건물이 보이고, 사진의 오른편에는 가로변 행랑 사이 사이로 조적조 다층건물이 건축되는 모습이 보인다.


보차가 분리된 종로가로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길가의 가로수가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신백화점이 신축되기 전의 풍경으로 후에 화신백화점이 인수하는 종로백화점 동아의 초기 모습이 보인다. 모더니즘풍으로 건축된 종로백화점 동아는 화재후 건축가 박길룡에 의해 역사주의 건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가로의 끝에는
신축중인 화신백화점의 모습이 보인다.

이 종각은 1915년 도로를 보수할 때 원래 있던 위치에서 약간 뒤로 옮겨졌으며,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으나, 1953년 그 위치에서 다시 뒤로 물려 중건되었고, 1979년 다시 뒤로 물려 대지를 145평에서 850여 평으로 확장하고 주위에 돌난간을 돌렸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연건평 144평의 중층(重層) 누각을 철근 콘크리트조로 재건하고 상층에 종을 걸었다.

한성전기회사와 황성YMCA는 종로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건축으로 한인의 중심가로였던 종로의 성격에 맞게 일인자본의 개입되지 않았다. 후에 한성전기회사는 종로경찰서로 사용되었다.

한일합방은 되었지만 종로2가는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북촌의 중심가로였다. 전통적인 육의전이 위치했던 이곳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조선의 강제점령이 신축되면서 부터다. 시계탑이 있는 건물이 조선에서 최초로 전차를 운영했던 한미전기주식회사 건물이다.

남산에서 바라본 조선은행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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