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註 이 글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여러 웹문서들과 문화재청에서 미륵사지를 발굴.조사한 김홍식님의
글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며 이 땅에서 이름없이 묵묵히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무명 목수님들에게 바치는
글입니다.
1. 글 머리에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인 서기 645년에 신라의 수도, 서라벌 남쪽 벌판에 높이 80m가 넘는 거대한 목조 건물이 탄생했다. 그것은 당시 삼국 중 가장 국력이 약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신라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주변의 9개국을 견제하기위해 즉,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하기위한 호국의 상징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자장의 건의에 의해 선덕여왕 14년(645)에 건립되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유학 중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護國龍)은 나의 장자(長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 목탑이 탄생된 지 20여 년 후, 삼국 중 국력이 제일 약하다는 신라는 외세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였고(고구려 멸망 668년) 이후 서기 935년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항복문서를 왕건에게 바치기까지 270년, 고려가 건국되고 400여 년, 도합 700년 동안을 이 목탑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명멸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서기 1238년 몽고군의 말발굽이 한반도를 짓밟고 들개기름에 젖은 그들의 더러운 손으로 이 목탑이 화마(火魔)속에 영원히 사라지던 그 순간까지.
2. 황룡사목탑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
가. 익산 미륵사지의 목탑과 동.서석탑
미륵사지석탑은 석조로 된 동.서탑과 목조인 중앙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석탑의 창건 년대는 백제 무왕 때이다. 삼국유사에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절의 건축을 도왔으니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서 백제 무왕의 재위 기간은 서기 600년에서 641년이고 진평왕의 재위 기간은 서기 579년부터 631년이므로 두 사람이 겹치는 기간은 서기 600년부터 631년까지이다.
또한 고문서에 백제 무왕이 한때 이곳 익산의 왕궁리로 천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 탑은 무왕대인 7세기 초 즉, 미륵사의 규모상 많은 재정과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어야 축조가 가능할 것으로 보아 무왕 정권이 굳어진 610경부터 630년 사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현재 6층의 일부까지 남아있는 서탑을 토대로 동탑이 현지에 복원되어있는데 그 사이에 목탑지가 있고 이 목탑은 축조 년대가 석탑인 동.서탑보다도 훨씬 이전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나. 일본의 호류사5층목탑
일본에는 우리 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 장인들의 솜씨가 살아 숨쉬고 있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세기 이후 백제의 장인인 사공, 맥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이 일본으로 상당수 건너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670년경에 세워진 호류사의 목탑이 백제 장인의 혼이 담긴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호류사 5층 목탑은 다른 일본의 목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일본의 다른 목탑, 이를 테면, 흥복사5층탑이나 동사5층탑 등은 자로 잰 듯 아래 위 각 층의 처마의 길이가 일정한 크기를 취하고 있는데, 이렇듯 체감비가 없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일본의 탑이다. 그러나 호류사5층탑은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체감비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경주 남산 마애 9층탑의 체감비와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 호류사목탑의 양식이 일본보다는 백제나 신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류사 5층탑은 초기 불탑의 형태로 내부가 폐쇄되어 있어 사리를 모시는 역할에 충실한 구조이다. 밖에서는 5층으로 보이지만 안에서는 맨 상층까지 뚫려 있는 구조이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응현 목탑은 층마다 계단이 연결되어 있고, 각 층마다 여러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일본 호류사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백제 목탑의 영향을 받은 이 5층목탑, 백제 공예가가 만든 비단벌레 불상궤, 지금은 화재로 훼손되었지만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의 벽화, 그리고 백제의 작품인 석가삼존상과 백제관음상, 구세관음상 등이 있다.
중국 서북지역에 위치한 산서성 응현. 바로 이곳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높은 탑이 하나 서있다. 목탑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응현 목탑이다. 정식 명칭은 불궁사석가탑(佛宮寺釋迦塔)이다. 서기 1056년 요나라때 건축된 이 응현목탑은 5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앞에 서면 사람들이 손수 쌓아올린 탑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함에 압도된다. 목탑은 무엇보다 규모가 세계 최대급이다. 안테나까지 포함한 높이가 67.31m, 1 층 지름이 30.27m이며, 총무게가 자그마치 743만 377t이나 된다고 한다. 더욱 기이 한 점은 모든 건축 부재가 목재이며, 쇠못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구조면에서 겉모양은 5층이나, 각 층 사이에는 또 다른 층, 즉 암층이라는 것이 하나씩 숨어있다. 그래서 이런 구조를 중국학계에서는 명오암구옥 (明五暗九屋)이라고 한다. 즉,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1층과 2층사이, 2층과 3층사이, 3층과 4층사이 그리고 4층과 5층 사이에 암층이 있어 안에서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모두 합하여 9층의 목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탑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목은 거의 1천년 전 모습을 거의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응현에 서경(西京)이라는 작은 도읍을 설치한 요(遼) 왕조는 청수(靑守) 2년(서기 1056)에 이 목탑을 건립했다. 당시 이곳 사찰은 이름이 보궁선사(寶宮禪寺)였다. 이후 금(金) 원(元) 명(明) 청(淸)왕조를 거치면서 증.개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기 때의 원형을 한 번도 잃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응현목탑은 황룡사 목탑보다 400년 이후에 지어진 목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룡사9층탑은 바로 이 응현 목탑보다 무려13m나 더 높다. 황룡사 목탑이 몽고군에 의해 소실되지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분명코 세계 최고 높이의 목탑이라는 영예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라. 경주 남산의 부처바위에 새겨진 목탑
경주 남산의 한 골짜기 탑곡에는 높이가 9m, 둘레가 30m에 이르는 부처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명랑이라는 신라의 고승이 삼국 통일 후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불상과 황룡사 9층탑을 이 바위에 새겨 놓고 기도를 올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바위에는 탑이 새겨져 있는데, 학자들은 이 마애 9층탑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황룡사 9층탑을 본뜬 것이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당시 목탑의 양식을 본 따 만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과연, 마애 9층탑의 모습은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까? 경주 사람들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부처바위에 새겨져 있는 탑을 보면 황룡사 목탑과 마찬가지로 9층인 것을 알 수 있다. 상륜부가 단순하게 처리되는 석탑과 달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목탑임을 보여 주고 있고,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들이 목탑임을 명확하게 해준다.
물론 확정적인 자료가 없어 이 마애 9층탑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애탑은 그 형태가 부조라는 점, 그리고 바위에 새겨 넣어 단순화되어 있는 표현으로 인하여 세밀한 묘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황룡사 목탑의 완전한 모습을 추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마. 개성 불일사의 금동소탑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은 이 마애 9층탑밖에 없는 것일까? 얼마전 북한의 문화재 도록인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국내 유일의 목탑 양식을 한 9층 금동소탑이 발견되었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2층 내부에서 발견된 이 금동소탑은 높이 37cm, 기단 부분의 길이 13.8cm로 옥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 4면에 걸쳐 8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탑 1층에는 3면에 걸쳐 8개의 문을 달았으며 각 층마다 창문을 낸 전형적인 목탑 형식의 금동탑이었다.
이 9층 금동탑은 황룡사와 같은 시기에 백제 사람에 의해 조성된 호류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신라 목탑의 양식을 충분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초기의 금동소탑이다. 또한 금동탑이 출토된 불일사는 고려 4대왕인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하는데, 광종은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부인인 낙랑공주와 형제간이다.
어머니의 원당을 세우는 과정에 여동생의 남편인 경순왕도 일정부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어, 이 과정에서 경순왕의 발원으로 금동탑이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경순왕은 경주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고 따라서 황룡사 9층 목탑 모습의 영향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황룡사는 위의 금동소탑과 마애탑을 기본적인 모습으로 상상하는데서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 계 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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