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溫突)의 기원과 변천
朱 南 哲
1. 온돌의 뜻과 기원
온돌이란 漢字로는 溫突 또는 溫堗이라 쓰며, 이는 고래를 만들고 고래 위에 구들장을 놓아, 고래 한 쪽에 만든 아궁이에 불을 지핌으로써, 구들장을 덥게 하여 그 열을 취하여 추위를 막는 난방장치이다.
이 온돌은 만주지방에 널리 쓰인 캉[炕]과도 흡사한데, 온돌이 데우고자 하는 실내의 전부 혹은 절반 정도만을 온돌 바닥으로 한다면, 炕은 실내의 한쪽에 벽돌로 쌓아 일부만을 덥게 하는 것이 다르다 하겠으나 그 근본은 거의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일찍이 孫晋泰 先生1)의 언급처럼 온돌과 炕은 같은 源流로서 韓半島의 북부와 만주지방에서 사용되어 널리 전파된 것이라 생각된다.
온돌이 쓰여진 실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咸鏡北道 鍾城郡 雄基 松坪洞 先史住居址로서, 이 주거지에서는 板石을 세워 구들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다시 板石을 덮어 바닥을 만든 것이 발굴되어 溫突의 유적으로 보지만2) 오늘날 학계에서는 심히 의문시하고 있어, 溫突의 始原이라 보기는 힘들다고 하겠다.
그것은 先史時代의 住居址로서 구들고래가 있었다는 사례는 오직 이것 하나이며, 이 주거지 발굴 전후에 발굴된 수많은 선사시대 주거지들을 살펴볼 때 모두 화덕자리는 있으나 구들고래는 없으며 화덕자리만 있다는 것은 바로 온돌과 같은 것의 존재를 부정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硏究3)로서는 온돌의 상한선은 막연히 三國時代인 四世紀末 이후라 할 수밖에 없다.
《三國志》魏書 東夷傳 高(句)麗條에
都於丸都之下 方可三千里戶三萬 多大山 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其俗節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立大屋 祭鬼神又祀靈星社稷…….
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또《舊唐書》卷一九九 上 列傳 第149 高(句)麗條에는
…其所居必依山谷 皆以茅草葺舍 唯佛寺神廟及王宮官庭乃用瓦 其俗貧窶者多冬月皆作長坑 下燃溫火以取暖……(밑줄 필자)
이라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기록에서 後者에는 “佛寺”라는 구절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이는 佛敎가 高句麗에 전래된 小獸林王 2年(A.D. 372) 以後의 기록이고, 前者는 그 이전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기록에서 가난한 사람들 즉, 貧窶者들은 대부분 겨울에는 장갱(長坑)을 만들고, 그 아래 불을 지펴 덥게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오늘날 온돌과 같은 것이거나, 아니면 이의 始原 樣式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물론 ‘長坑’만으로 이것이 혹 중국의 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나, 고구려 유적지[土城里 遺蹟]에서 火道4)가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또《隋書》卷八 列傳 第四六 東夷에 “俗好蹲踞 潔自喜以趨走烏敬拝則曳一脚”이라 기록된 것이나 또 雙楹塚, 四神塚의 벽화에서 墓主들이 平坐한 모습, 그리고 서있는 사람들의 바지 엉덩이에 뾰족한 모습으로 되어 이것은 삼각형 천을 덧댄 것으로 평좌에 기인된다는 복식사적인 생각 등으로 長坑은 분명 溫突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長坑이라는 구절이 나타나 있는 기록에만 “佛寺”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온돌의 발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서기 372년 이후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즉, 5세기경부터 온돌은 발생, 전파되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2. 온돌의 전파와 발달
온돌은 분명 추운 北方系의 난방구조라 생각된다. 그리고 처음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난방구조로 발생하여 점차 지역적으로나 계급적으로 전파되어 나갔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우선 지역적으로 생각할 때, 고구려와 인접해 있는 백제나 신라에서 온돌을 만들어 사용하였는지를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百濟의 주택에 관계된 자료나 문헌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우선《新唐書》東夷傳 百濟條에
“俗與高麗同”이라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 별차 없는 주택에서 생활하였고, 또 온돌도 가난한 사람들 간에 사용되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三國遺事》卷第2 南夫餘前百濟北扶餘條에
又泗沘崖又有一石 可坐十餘人 百濟王欲王興寺禮佛 先於此石望拜佛 其石自煖因堗石(밑줄은 필자)
이라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서,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지므로 이를 堗石이라 했다 하며 堗石에 대하여 아무런 註가 없는 것을 보면 溫突이 백제에서도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다음 신라에서는 온돌의 존재를 긍정할 자료도, 또 부정할 자료도 충분치 않기 때문에 무어라 말할 수 없다.
《三國史記》卷第三三 志第二 屋舍條에서 溫突을 지칭할 만한 구절을 찾아 볼 수 없고, 또《三國史記》卷第三 新羅本記 第一에
憲康王六年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間 覆屋以瓦 不以茅炊飯以炭 不以薪 有是耶…….(밑줄 필자)
이라 기록되어 이 기록에서 경주의 민가들이 장작으로 밥을 짓지 않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는 것이 곧 온돌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또한《新唐書》東夷傳 新羅條에
…冬則作竈堂中 夏以食氷上…
이라 기록되어, 이로써 겨울이면 室內에 부뚜막을 만들었다는 것이 곧 온돌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이도 꼭 그렇게만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여름에 얼음을 사용할 수 있는 계급이란 궁궐에 출입할 수 있는 귀족계급이었을 것이며, 또 겨울에 실내에 부뚜막을 만든다는 것은 겨울이면 실내의 부뚜막을 사용한다는 해석이 보다 더 올바르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매년 겨울이면 만들고, 여름이면 부수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高句麗에서도 盛冬이면 長坑을 만든다는 것이 한 번 만든 것을 여름이면 사용하지 않다가 겨울이면 사용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고, 더욱이 오늘날도 여름이면 부엌 마당에 한데 부엌을 만들어 거기서 밥을 짓는 것과 안압지에서 출토된 ‘풍로’들을 보면 이런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에 溫突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현단계로서는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실정이다.
한편 한국 주택 나아가 한국 건축의 중요한 二大 바닥 구조의 하나인 ‘마루’가 신라시대부터 건축되었다는 추측의 가능성도 온돌연구에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三國遺事》卷三 塔像 第四에
…朴朴師 占北嶺獅子嵓 作板屋 八尺房而居 故云板房 夫得師 占東嶺磊石下有水處 亦成方丈而居焉 故云磊房…
이라 기록되었으니, 이 기록에서 사자암에 가서 손쉽게 만든 도 닦는 처소[方丈]가 8尺 넓이의 판옥이며, 이를 板房이라 한 것은 그만큼 당시에 널리 보급된 구조라 생각되고 더욱이《三國史記》卷三三 志第二 屋舍條에서 玳瑁나 沈香 같은 고급 목재를 쓸 수 없었다는 사실이나, 家型土器에서 바닥이 높이 붙어 있는 것 등은 모두 마루의 존재를 입증해 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5)
따라서 추운 겨울이 긴 북쪽지방으로부터 온돌이 발생되어 남쪽지방으로 전파되었고, 더운 여름이 긴 남쪽지방으로부터는 마루가 발생하여 점차 북쪽까지 전파되어 나간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를 지나 高麗時代에 이르면, 온돌은 한반도 전국적으로 보급되고, 또 계급적으로도 서민계급에서 상류계급까지 널리 퍼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생각은 우선 王朝와 같은 상부 구조가 바뀐다고 하여 한 번 건축하면 상당한 기간 사용되는 주택과 같은 하부 구조 또한 곧 바뀌는 것이 아님으로써, 삼국시대에 널리 사용되었던 온돌이 고려초부터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온돌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문헌으로는 崔滋(A.D. 1188∼1260)의《補閑集》을 들 수 있는 바, 同書 卷下에
華嚴月首座餘事……有黙行者 不知族氏年可五十 或爲髮或爲頭陀……時豫適在龜城 道人存純 謂豫言行者 嘗冬月敷一座具 差一衲衣 衲中無蟣螽坐氷堗上寒色不形 學道後進 抱冊往從質疑者 無不委細開說 方大寒恐 其凍也 候出時遺房子 急爇柴頭溫其堗而去 行者來觀之無喜溫色 徐出戶拾石礫塡堗口泥其灰塗隙而上 宴坐如初自是不復遺溫也…….(밑줄 : 필자)
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의 내용은 평안북도 龜城에서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黙行者에 관계된 행적으로서, 崔滋가 氷堗이니 溫其堗이니 또는 堗口 등에 대하여 아무런 註 없이 기술한 것을 보면 분명히 온돌이 당시에 널리 쓰이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李奎報의《東國李相國集》後集 卷七條에
冬月臥泳堗 寒威來刮骨 幸今燒拙揖 一束炎己發
이라 하였고, 이 기록에서도 泳堗에 대하여 아무런 註없이 사용한 것은 바로 같은 이유라 하겠다.
더욱이 조선시대 초기의 사람인 李奎景의《五洲衍文長箋散稿》卷十 溫堗坑辯証說條에서 당시보다 100여 년 이전인 高麗 시대 末期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舊退計百年前公卿貴戚宅中煖堗不過一二間爲老病所處餘皆板架上寢處其廳中囲以屛帳籍以重茵…
이 기록은 바로 上流 주택에서는 온돌방을 노인이나 병자들을 위해 한두 칸 만들고 나머지는 마루로 하여 거기에 병풍과 장막을 둘러치고 지낸 것을 말해 주는 바, 이는《高麗圖經》에서 말해 주는 상류주택의 모습으로 이로써 고려시대에도 온돌은 전국적으로 또 상류계급까지 전파되었으나, 이를 주로 사용한 계급은 서민계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조선시대의 온돌
1) 온돌의 계승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점차 온돌은 전국적으로 그리고 모든 계층간에 널리 전파되어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조선시대 초기부터의 주택실례가 현존하며, 더욱이 中期 이후에는 많은 수의 實例들이 현존하기 때문에 온돌에 대한 고찰은 용이해 진다.
현존하는 住宅遺構中 가장 오래된 것은 江陵市 竹軒洞에 있는 강릉 烏竹軒(寶物 165號)으로써 본래 1452년 登弟하여 兵曹參判, 大司憲을 지낸 바 있는 睡齊 崔應賢의 고택으로 후일(1573년 12월 26일) 이 軒의 온돌방(夢龍室)에서 李珥가 탄생하였다.
이 軒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인 바, 좌측 4칸은 우물마루 바닥으로 되어 있는 大廳이고, 우측 1칸 반은 온돌방이며, 이 방 후면으로 반 칸의 툇마루가 달려 있다.
또 이보다 조금 후대에 건축된 강릉 海雲亭(寶物 183號, 1530년 건축)을 보아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좌측에 한 칸의 온돌방을 우측에 4칸의 우물마루로 된 대청으로 구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은 바로 초기부터 온돌로 된 방과 마루로 된 대청이, 주택, 혹은 정자에 있어 그 평면을 결정해 주는 두 개의 기본 요소가 됨을 말해 주는 것이다.
위의 두 실례보다 더 규모가 크고 정자나 별당, 또는 사랑채만의 성격을 벗어난 상류주택으로 月城 孫東滿氏家(慶北 慶州郡 江東面 良洞, 重要民俗資料 23號)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주택은 孫東滿씨의 19代祖 孫昭(1433∼1484)가 25세 때 건축한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으로 一字形 행랑채와 口字形의 몸채로 그 平面이 구성되어 있다.
一字形 행랑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인데, 광이 4칸, 방 2칸, 마루 1칸, 대문 1칸으로 구성되어 행랑인의 거처로는 온돌방이 주를 이룬다.
몸채는 口자형 평면의 대각선을 중심으로 안쪽에 안채, 바깥쪽에 사랑채가 있는데, 안채는 부엌, 안방(3칸), 대청(6칸), 머릿방(2칸)으로 구성되고, 사랑채는 한 칸되는 두 개의 방과 1칸의 대청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평면의 구성에서 온돌의 바닥으로 된 방과 우물마루바닥으로 된 대청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인 河回 忠孝堂(慶北 安東郡 豊川面 河回洞, 寶物 414號)을 살펴보면, 一字形 평면으로 된 행랑채와 口形의 평면으로 된 몸채, 그리고 祠堂으로 구성되었다.
몸채에서 안채를 살펴보면 부엌 옆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크기의 안방이 붙고, 그 옆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안대청, 그리고 여기에 다시 상방과 기타 방들이 붙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사랑방, 같은 크기의 골방, 그리고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 그리고 다시 작은 방과 작은 대청이 붙어 있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 말기에 건축된 주택들 또한 허다한 실례들이 현존하며 이들 주택 모두에서 온돌바닥으로 된 방들과 우물마루로 된 대청이 주택을 형성하는 기본요소이며, 또 온돌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그대로 계승되어 축조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2) 주택 평면과 온돌
한반도는 과히 넓지 않은 땅이면서도 이는 海洋性 氣候地域에 속하여 다양한 풍토성을 이루며, 이로써 조선시대 주택건축에 영향을 주어 각 지방마다 상이한 평면구성을 이루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반도에 나타난 다양한 庶民住宅의 평면들을 유형별로 고찰할 때 바닥이 온돌로 된 房, 바닥이 마루로 된 大廳, 바닥이 흙바닥으로 된 부엌, 이상 세 가지가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바, 이는 그만큼 온돌바닥의 중요성을 말해 주며, 또 이로써 분류된 것을 보면, 함경도 지방과 평안도 지방에는 부엌과 방들로만 구성된 것이 일반적이며 중부 이남에서는 이에 대청이 첨가된 것을 볼 수 있다.6) 즉, 이는 온돌이 한국 주택의 구성에 기본이 됨을 말해 준다.
특히 한반도 전역에 나타난 가장 적은 단위의 주택을 보면 어느 지역이고 간에 부엌 한 칸에 온돌방 한 칸으로 구성되며, 또 조금 커져 방 한 칸이 두 칸이 될 때에도 온돌방으로만 구성되고, 추운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는 중류 이상이라야 마루로 된 대청이 설치되는 것을 보면 온돌방의 중요성은 자못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온돌방은 구들고래, 아궁이의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방 전체를 구들고래와 구들장으로 구성하는 方法으로 한반도 전역 대부분에 분포된다.
둘째, 방 전체 크기의 2/3 정도만 구들고래를 제대로 놓는 방법으로 제주도 지방의 주택들이 이 모습을 이루고 있다.
다음 불때는 아궁이의 형태에 따르면
첫째, 아궁이 그 자체만으로 구들장을 데우는 경우로, 이는 전국적으로 독립된 방에 채택된다. 예컨대 아궁이와 부뚜막을 겸하는 두 번째의 경우를 제외한 것이다.
둘째, 아궁이가 곧 조리를 담당하는 부뚜막이 되는 것으로 보통 안방이 이에 속하며, 따라서 안방 옆 아궁이가 놓여지는 공간은 부엌이 된다.
그러나 함경도 지방에서는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체가 없어 아궁이를 겸한 부뚜막이 방과 같은 높이에 오고, 그 아래에 커다란 아궁이가 딸리고, 따라서 부엌 바닥은 안방의 높이와 상당한 차이를 이루게 된다.
셋째, 제주도 지방의 부엌에서는 아궁이와 부뚜막이 별도로 독립되는 바 솥을 거는 곳이 방에 불때는 아궁이의 다른 쪽으로 붙어 있다.
다음 구들을 놓는 방법을 고찰하면, 제일 보편적인 것이 구들골을 나란하게 하는 나란히고래이고, 이외에 부챗살 모양으로 하는 선자고래, 그리고 구들고래를 형성하지 않고, 구들장 네귀에 돌을 놓아 구들장을 괸 허튼고래, 이상 세 가지의 어느 하나로 만들어지게 된다.
3) 坐式生活과 온돌
한국 민족이 住生活에 있어, 언제부터 坐式生活로 접어들었는지 지금 단계로서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는 아마도 선사시대의 竪穴住居內에서의 생활이 자연히 좌식생활이었다고 생각되며, 이 생활은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건축다운 건축이 이루어지고, 계급사회로서 계층간에 어떤 차이점이 형성되면서 주생활상에서도 차이가 생겨, 분화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예컨대 高句麗의 壁畵古墳에서, 墓主 부부가 平坐하고 있는 모습이 있는 반면, 또 어떤 벽화에서는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도 있는 것으로 보아, 立式生活도 병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시대의 문물을 기록한《高麗圖經》에서 귀족층은 ‘臥榻’같은 것을 사용하는 즉, 입식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7)
그러나 韓國傳統住宅의 정수라 할 조선시대 주택에서는 온돌과 마루가 主 바닥구조가 되고 여기에서의 생활이 좌식인 것은 바로 삼국시대 서민층으로부터 형성해 온 온돌이 한국 생활의 좌식생활 형성에 큰 원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온돌에서 이루어진 좌식생활은 家具의 樣式도 좌식생활에 맞게 영향을 준 가장 기본적인 요인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온돌은 좌식생활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좌식생활은 가구의 양식을 결정하였고, 이것은 곧 주택의 내부 공간구성에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안방의 내부 공간구성8)에 있어 안주인이 앉아 있는 아랫목 주위에는 문갑, 반닫이 등의 坐高의 눈높이 아래에 오는 家具들을 놓고, 윗목에 키가 큰 四方卓子나 또는 윗방에 삼층장이나, 농들을 놓는 것은 바로 좌식생활이 내부 공간구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이며, 이는 곧 온돌에서 기인된 것이다.
특히, 아궁이와 가까운 아랫목 온돌바닥이 내부 공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인 되는 이의 자리인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4) 안방물림과 온돌
조선시대 住生活에 있어 가족제도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儒敎의 영향으로 家父長的인 大家族制度가 이루어진 것이고 이에 따라 주택은 대가족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이 확대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주인의 居處空間인 사랑채와 안주인의 거처공간인 안채가 全住宅空間에서 가장 중요한 位階에 있고, 이중 안채에서는 안방이 곧 ‘안주인’을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안방을 차지하는 사람이 안주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안방을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소위 ‘안방물림’은 바로 자신이 안주인에서의 은퇴와 며느리에게 집안의 모든 일을 인계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 때 안방이 왜 건넌방이나, 머릿방, 또는 상방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는 아마도 안방에 불때는 아궁이 그 자체가 부뚜막이 되고, 이는 곧 부엌을 이루며, 나아가 안에서의 일 중 가장 중요한 식생활의 주인이 됨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金光彦의 지적9)처럼 井邑 金東洙家에서는 안방물림은 없으며, 이 때 안방과 작은방(또는 윗방)을 비교하면, 방의 크기나 모습이 같고, 또 두 방 다 한 쪽에 부엌[정재]이 붙어 있는 것은 비록 하나의 事例라 하나 주의를 요하는 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것은 안방물림이 있는 여타 지역, 예컨대 경상도 지방의 주택에서는 안방은 부엌과 붙어 있고, 또 크며, 머릿방 또는 상방은 부엌과 떨어져 있고 독립된 아궁이로 불때게 된 것을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 진다고 할 수 있다.
4. 결 어
한국의 온돌은 고구려의 서민계급에서 5세기경 발생하여 점차적으로 백제나 신라로 전파된 듯하며, 한편 신라에서 발생된 마루와 함께 한국전통주택의 二大 바닥구조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의 주택, 특히 조선시대의 주택평면을 고찰할 때 온돌과 마루는 부엌과 함께 세 가지의 구성요소로, 이들에 따라 평면의 유형이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온돌은 한일합방 이후의 한식주택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또 일본식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주택에서까지도 계승되어 왔다.
더욱이 최근에는 난방법이 온수난방으로 대체되면서 소위 판넬히팅으로 바뀌었으나, 이도 실제 온도의 원리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너지자원 특히 석유자원이 없는 한국으로서는 온돌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와, 이의 개량으로서 유구한 역사의 소산물인 온돌을 계승 발전시켜 에너지 보존이라는 국가적 요구에 부응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이 방면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본고에서는 온돌의 기원과 그 계승, 중요성만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끝을 맺는 것이다.
□ 참 고 문 헌
金光彦,《井邑김씨집》, 悅話堂, 1980.
金正基,〈文獻으로 본 韓國住宅史〉,《東洋學》7集, 1977.
-----,〈溫突についての二,三の考察〉,《日本建築學會論文報告集》 제 60號, 1958.
金載元,《韓國史》-古代編-, 진단학회.
孫晋泰,《民俗學論攷》, 民學社.
朱南哲,《韓國住宅建築》, 一志社, 1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