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일본의 차이
독일과 일본의 차이
독일과 일본의 비교점이 무언줄 아세요
그들의 과거 청산의 노력여부입니다
독일의 경우는요
나치당을 만들지도 못하게 법아능 만들었구요
그법안에는 나치주의등 사상을 퍼트리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나치라는 사상을 퍼트리면 무거운 형벌을 받게 해놔죠
글구요
나치전범들은 공소시효를 없애습니다
공소시효를 없애서 그들을 끝까지 찾아서 체벌 받게 하겠다는 취지죠
지금도 나치전범의 재판은 게속되어 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과 독일은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구요
이스라엘 재건때 독일이 엄청난 경제적 후원을 아무 조건없이 했답니다
독일은 그들의 역사속에 나치가 저질은 만행을 역사교과서에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수록해서 후손들에게 다시는 그런인 과오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교육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역사왜곡과 함께 아무런 보상은 거녕 사과도 하지 않고 있죠
더욱더 그들이 식민지화를 한것에 대하여 정당성만을 주장하고 있죠
그것도 모잘라서 일본은 과거의 환영에 빠져 군사 대국으로 가려는 조짐이 보입니다
자위대 이라크 파명은 그들이 세계평화를 가장하여 군사대국으로 가려는 조짐의 출발이라 보여지는데요
일본의 자위대는 군대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국민들을 지키기위한 말그대로 자위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급이 없습니다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죠
그들의 정식국가 국기 또한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기는 단지 일본을 표현하는 표시일뿐이죠
2차대전패전된후로 군가와 국기를 사용하지못하도록 un에서 결의 한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건 제가 대학때 일본근대사교수님잉 말씀해주셨습니다
왜냐면 일본의 국가는요 일본국왕을 찬양하며 그들의 영역을 더 확장하자는 내용이거든요
글구요
국기는 지금의 국기와은 조금 다릅니다
중아에 빨간만있구요
주위에 빨간 줄은 없애습니다
그의미는 그들의 영역을 넓히자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선진국이 어느나라 일까요
지금의 일본은 유엔의 안보리상임위원국으로 등록할려는 조짐까지 보입니다
유엔안보리가 어떤 곳인가요
전쟁패전국2국가중에 한나라는 가만히 있구요
한나라는 지금 진출를 할려고 이라크파명을 합니다
자기들도 세게평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증거을 보여주려구요
제가 일본서 역사를 전공을 했지만 일본은 정말인지 화가 나지만요
우리가 지금이라도 잘못된 역사의식을 갖져다면 바로잡고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를 가르치죠
이미 엎질러진 물은주어 담을 수 없지만 다신 엎지르지 않으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 까요
너무들 피해의식을 갖지 말죠
당당한 한국인이잖요
그래도 우리는 한국인 잖아요
우리가 한국을 게속 비판하면 누가 우리 한국을 세워 줄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는 자주독립국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화이팅!!!!!!
1969년도 독일 수상에 선출된 빌리 브란트는
2차대전 피해 국가들을 방문하여 독일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1970년 먼저 폴란드를 방문해서
유대인 학살 위령비를 찾아 나치의 만행에 대해 사죄했습니다.
헌화 도중 브란트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참회의 묵념을 올렸습니다.
겨울비 내리는 가운데 위령비 앞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물고인 시멘트 바닥에 무릎꿇고 참회하는
브란트의 진심어린 사죄의 용기에 세계인들은 감동했습니다.
돌아 오는 자동차안에서 폴란드 수상이 브란트를 껴안으며 울었습니다.
폴란드 국민은 브란트의 놀랍고 솔직한 사죄의 용기에
바르샤바에 "브란트의 광장"을 만들어 화답했고
독일의 진심을 읽고 용서했습니다.
독일은 이스라엘을 보호할 도덕적.역사적 의무를 지고 있다. "<div style='visibility:hidden'>.</div>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27일 독일 시사 주간지 '디 차이트'와의 회견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의 의무를 내세워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제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판매 허용 방침을 밝혔다.<div style='visibility:hidden'>.</div>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란 역사적 부채 의식을 거론하며 그동안 논란이 돼온 미사일 판매 문제에 선은 그은 것이다. <div style='visibility:hidden'>.</div>
이스라엘은 최근 독일 정부에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인 패트리어트의 판매를 긴급 요청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할 경우 1991년 걸프전 때처럼 이라크가 스커드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div style='visibility:hidden'>.</div>
요청을 받은 독일은 고민에 빠졌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해온 독일 정부가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판매하는 것은 이라크전 불개입 정책을 스스로 깨뜨리는 결과가 되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div style='visibility:hidden'>.</div>
하지만 집권 사민당과 녹색당은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당사자가 아닌 제3자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며▶패트리어트 미사일은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이고▶독일과 이스라엘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들어 이스라엘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div style='visibility:hidden'>.</div>
또 다른 야당인 기독교연합과 자민당도 이스라엘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판매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div style='visibility:hidden'>.</div>
페터 슈트루크 국방장관은 "이스라엘은 이미 2년여 전부터 패트리어트 판매를 요청해 왔으며 최근 구체적인 요구를 다시 해왔기 때문에 이제 독일 정부는 결정을 내려야 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div style='visibility:hidden'>.</div>
베를린=유재식 특파원<<a href=mailto:jsyoo@joongang.co.kr>jsyoo@joongang.co.kr</a>><!--@본문끝@-->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이 주도했다.
명성황후를 처참하고 치욕적으로 시해한 범인은 조선에 있던 미우라공사와 일본 깡패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 행동대원일 뿐이고, 진짜범인은 당시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총리대신으로 있던 일본정부이다.
상식적으로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은 국가가 정부차원에서 개입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시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왕비를 살해하는 일은 일본 외무성의 국장급인 주한공사 정도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당시 총리대신인 이또오 히로부미가 결정하고, 외무대신출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총지휘를 맡은 사건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군부(軍部)가 적극 개입되었고, 조선에 있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공사는 행동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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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사건 바로 한달 전의 주한일본공사가 바로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이노우에는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친구인 이또오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정계를 움직이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에 관한 전결권을 위임받아 조선에 있으면서 온갖 내정간섭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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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이노우에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한달 전 돌연 사임을 하고, 대신 후임으로는 외교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중장출신의 미우라를 천거해 그에게 명성황후 시해의 행동대장 임무를 맡긴다. 즉 이노우에는 미우라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배후조정을 한 것이다. 이러한 내막은 미우라가 남긴 수기에 잘 나타나 있다.
미우라와 이노우에는 같은 고향으로 학교 선후배 사이이며, 이노우에는 누구보다도 미우라의 과격한 성격을 잘 알기에 군부(軍部)에 적극 추천했다. 군부는 이노우에게 사건을 직접 맡을 것을 제의했지만, 이노우에는 유혈사태에 직접 관여하는 것을 피하고자 행동적이고 영웅심이 강한 미우라를 추천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 군부의 실세들은 조선침략의 걸림돌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뒤 무력을 동원해 친일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인물은 삼국연의의 장비(張飛)와 같은 저돌적인 돌격대장 미우라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범행의 주역인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한성신보 사장) 자서전에 따르면, 1895년 9월1일 갑자기 주한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는 시해작전의 선봉을 맡은 자신과 만나 명성황후 시해를 의미하는 ‘여우사냥’이란 말을 처음 꺼내는 등 구체적으로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우라의 수기로 본 일본정부의 움직임
한일관계사를 연구해온 도쿄 가쿠게이 대학의 이수경교수는 미우라의 고향 도서관에 보관 중인 ‘관수장군 호쾌록(豪快錄·1918)’과 ‘관수장군 영웅론(1920)’, ‘관수장군 종횡담(1924)’과 ‘관수장군 회고록(1925)’ 등을 모두 입수해 명성황후 시해 관련 내용을 발췌해 공개한 적이 있다. (관수장군은 미우라를 의미하며, 이 책들은 대출금지도서이다)
미우라는 호쾌록에서 자신은 주범(主犯)이 아니라 꼭두각시처럼 행동한 ‘종범(從犯)’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을 자신의 수기 곳곳에 남겨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한다. 또한 이교수는 미우라와 관련된 문서 등을 살펴보면 ‘일본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증거들이 여러군데 있다고 풀이했다.
‘관수장군 회고록’에 따르면, 1895년 7월쯤 고향선배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대장이 당시 중장으로 퇴역한 뒤 추밀원 고문으로 있던 미우라에게 급히 조선으로 갈 것을 종용하자, 미우라는 “나는 외교에 대해 일절 모르니 조선을 합방 또는 독립시켜야 하는지, 러일 공동의 지배에 두어야 하는지부터 우선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야마가타는 재차 “당신이 밝히라고 한 것은 중대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사안이라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결정될 것이니 하루빨리 조선으로 건너가라.”고 했고, 미우라는 “정부의 방침대로 조선에 온 이상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고 자신의 수기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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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우라는 1896년 1월 형식적으로 수감됐던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든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든지 야마가타가 나를 조선에 가도록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나를 고생해 불쌍한 놈으로 여기고 있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수경교수는 “미우라가 사건 몇 달이 지나자 스스로 꼭두각시로 농락당했다는 점을 자각한 상태로, 미우라를 직접 추천하고 사건을 모의한 이노우에나 당시 총리였던 이또오 히로부미가 면회를 오지 않았던 것을 불평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미우라는 호쾌록에서 석방 직후 이토 히로부미가 축하사절로 보낸 다나카(田中)궁내대신(왕실장관)에게 “이또오씨가 그렇게 친절하다면 관계 대신 한두명을 보내 내가 한 짓(시해사건)을 듣는 게 어때?”라면서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미우라의 수기만 보아도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0월 8일 오전 9시 20분에 주한일본공사관의 니이로(新納) 해군소좌는 본국 육군참모부에 한 장의 전문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이것도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개입한 증거라 하겠다.
형식적인 히로시마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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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를 자신들이 저지른 짓임을 철저하게 은폐하려 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에서 비롯된 사고로 선전했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는 외국인 목격자들이 많았다. 목격자들은 각자 본국으로 이 사건을 보고해 서방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특히 1895년 10월 31일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의 보도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일본 측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일본을 비판하고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세계적으로 들끓자, 일본 정부는 살해범으로 지목된 48명의 용의자를 전부 도쿄로 소환한다.
사건을 히로시마 재판소에 넘기고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 뒤 가담자 전원을 ‘증거불충분’이라는 어이없는 이유로 석방한다. 범죄자들은 석방된 뒤 구국의 영웅으로 일본 전 국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일본 국왕도 시종대신을 보내 시해범들에게 수고했다고 하면서 노고를 치하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일본 정부는 살해범들을 처벌할 의도가 없었다. 왜냐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군.관.민과 정부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장 목격자가 있고 증거가 많이 있는데도 살해범들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후 모두 출세가도를 달린다. 이것이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저지른 짓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핵심 인물이었던 시바 시로우는 정치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고 국회의원에 수차례 당선되며, 낭인 동원책이었던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 겐조는 내각의 내상(내무부장관)에까지 오른다. 그 외에도 명성황후 시해범 대부분은 정치요직에 발탁되거나 사회적인 부와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당시 시해가담자 중 한명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도 “왕비 살해를 일본의 모든 이들이 생각하고 있었다.”는 문구를 머리에 적었고, “왕비 살해의 필요성은 미우라도 일찍부터 생각해 오고 있었다.”고 말한 점과, 일본의 수비대가 시해작전의 주력이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봐도 일본정부가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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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의 원흉은 이또오 히로부미
명성황후께서 시해당한 해로부터 14년 후인 1909년 대한의 육군중장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다.(이또오 히로부미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하늘의 응징을 당한 것이다) 안중근장군은 재판과정에서 이또오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를 15가지 죄목으로 나열했다. 그 중 첫 번째 이유가 바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이다.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
14.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안중근장군은 이또오 히로부미를 살해한 죄로 여순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시신조차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한 일본X들은 아무도 처벌되지 않고 오히려 영웅으로 추대되어 부와 권력을 모두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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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또오 히로부미는 현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의 인물이며, 이노우에 가로우의 탄생지에 있는 타카다공원에는 이노우에의 동상이 서있다. 공원의 처음 이름은 이노우에의 업적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이노우에공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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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도자와 독립군을 고문한 고문 기구들
마침내 지방법원 법정에 들어갔다. 1910년 그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맨 앞 열에는 가운데는 '재판장' 그리고 좌우에는 '판관' 아래 열에는 '피고' 다음 열에는 '통역관' '서기' 다음 열이 '원고' '공소인' '변호사' 자리라는 팻말이 놓여 있었다. 마침 법정에는 아무도 없기에 나는 피고석에 앉았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는 안중근 사건에 대한 제6회 언도 공판이 있었다. 이날 마나베(眞鍋十藏) 재판장은 판결을 언도했다.
"피고인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우덕순을 징역 3년에 처한다. 피고인 유동하, 조도선을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이날의 안 의사 모습을 대한매일신보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피고석에 앉은 안중근은 조금도 동요치 않고 빙그레 웃으며 "이보다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재판장에게 더 극형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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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벽에는 관람객을 위해 안중근 의사의 여러 사진과 안 의사가 폭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 등을 한문과 우리말로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다. 옆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 등이 감옥에서 재판정으로 오갈 때 탄 마차 수레와 '筒帽(통모, 용수)'가 전시되었고, 이어 법원장실, 검찰관장실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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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방부터는 각종 고문 기구들이 전시돼 있는데 '碎身具(쇄신구, 시체의 흔적을 없앨 때 쓰는 기구로 맷돌처럼 만들었음)', '抱火爐(포화로, 손과 발을 도르래에 달아 쇠사슬에 묶어 난로에 몸을 붙여서 타 죽게 함)', '剝皮具(삭피구, 사람의 살갗을 벗기는 고문기구)', '匣脚(갑각, 인체를 고정시키고 발가락에 바늘을 박는 고문기구)', '弔大掛(조대괘, 동시에 두 사람을 매다는 고문기구로 허리나 뼈가 탈골케 하거나 골절되게 하는 고문기구)' 따위의 숱한 고문기구들을 진열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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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이번 답사를 계획하면서, 그리고 간밤까지만 해도 이제 나라를 빼앗긴 지 100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먼저 일본을 용서하고 새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자세로 보고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이들 고문 기구를 보니까 '사람의 탈을 쓴 이들이 이토록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일본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싹싹 빌지 않는 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한 시간 남짓 숨을 죽이며 법원 안팎을 둘러본 뒤 그곳 책임 관리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는 택시를 타고 뤼순감옥으로 갔다.
마루타의 실체 http://cafe.daum.net/wnaksgidthcnr/JBDK/121
일제의 만행 http://cafe.daum.net/wnaksgidthcnr/Jrxa/155
임산부와 유약자 조회 금지
일본경찰의 고문 장면 (만화 이미지)
물먹이고 발로 배밟기
일본군 고문만행 공중전
먹방에서 가죽옷을 입은 독립군
관에 산채로 넣고 물붓기
펄펄끓는 뜨거운물 붓기
손톱사이 대나무 찌르기
못박힌 상자안에 가두고 흔들기
강제로 석탄먹이기
수엽잡아당겨 뽑아버리기
인두로 가슴지지기
전기고문하기
족쇄 수갑 채우기
유관순 (1902.12.16-1920.9.28 독립운동가)
서대문 형무소 검거당시 17세
17세 또는 19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알려지는데 제가 알기론 17세 인것 같습니다.
유관순 언니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딜수없는 고문을 받으셨는데요
그중 몇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대표적으로 성폭행을 당하셨습니다.
그것도 고문을 당하고나신 뒤 몸이 만신창이가 되신 상태에서 당하셨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짐작 할수 있습니다.
게다가 성폭행은 육체적으로만 아니라 성적, 정신적 피해도 뒤따르니까요.
그리고 일본군들은 유관순 언니의 머리에 콜타르를 바르고 마치 가발을 벗기듯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릿가죽을 통째로 벗겨냈다 합니다.
게다가 피부없는 생살....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손톱을 뺀치로 들어다 놨다 하면서 서서히 뽑는 고문도 했다고 하네요(열손가락 모두)
위와 호스를 연결시켜서 이물질이나 변등을 위에 강제로 투입시키는 고문도 행했다고 하는데요
우린 견딜수 없었을 아주 역겨운 고문도 유관순 언니는 참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면도칼로 귀와 코를 모두 깎아내버렸다고 하네요..
또한 밥에 모래와 쇳가루등을 넣어서 먹였다고 합니다.
짐승도 먹지않는 그것을 사람이 어찌 먹겠습니까?
거꾸로 천장에 매달아놓은채 코에 고춧가루나 후추를 탄 물을 붓는 고문도 실행됐다고 합니다.
무려 세시간 동안, 고춧가루과 후춧물을.... 아....생각만해도...
그리고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수있는 작은 나무상자(대략 라면상자만큼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에
긴 대못을 박아넣고 그속에 유관순 언니를 강제로 접어서 넣다고 하네요.
안그래도 옴짝달싹 못하는데 대못이라뇨.. 그리고 삼일간 가둬눴다고 하니...
그리고 여자에게 가장 치욕스럽고 수치스런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많은 사람들이 보는곳에서 발가벗겨지는 것입니다.
일본군들은 모든 독립열사들께서 보고있는곳에서 유관순 언니를 발가벗겨서
일본군들이 항상 지니고있는 서슬퍼런 칼로 양쪽 가슴을 모두 잘라냈다고 하네요..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발바닥 가죽 벗기기 입찢기 전기고문 달군 인두로 허벅지 지지기
음부와 겨드랑이 털을 달군 쇠로 태워버리기 시뻘겋게 달궈진 쇠몽둥이도 등 후려치기
상체를 벗겨서 채찍으로 등 후려치기 입과 호스를 연결하여 물 주입하기
(결국엔 몸의 일곱구멍으로 다 새어나온다네요)
유관순열사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그녀의 시신인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시체를 받았는데...
그렇게 온 시신은 아주 끔찍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 몸통, 사지가 따로따로 잘라져서 여섯토막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코와 귀가 잘려나가고, 머리카락이 머리가죽채 뽑혀지며 손톱, 발톱도 뽑혀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이 엄청난 만행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 가치를 가슴에 간직해야 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열사의 마지막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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