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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연산 고택지

시인의마을들 2011. 3. 2. 17:55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3호
명 칭 영산향교(靈山鄕校)
분 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교육기관/ 향교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1983.08.06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교리 52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향교재단
관리자(관리단체) 향교재단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창녕군 문화관광과 055-530-2236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교육기관이다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중종(재위 1506∼1544) 때 다시 지은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출입문인 풍화문, 공부하는 곳인 명륜당과 동·서재, 사당인 대성전 등이 있는데,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이하게 명륜당과 대성전이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위치하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동·서무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제사만 지내고 있다.

영산향교는 이 지방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많이 제공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며, 향교 앞에는 전통 가옥이 있어 주변경관도 아름답다.

 

 

 

 

 

 

 

 

 

 

 

 

 

 

 

 

영산 신씨고가

- 정비되기 이전의 영산 신씨고가 모습. © 문화재청

남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뜻밖에
영산이 어디에 있는 곳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영산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고장이 되었습니다. 지금 영산은 창녕군에 속해있는 면 단위의 마을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창녕과 맞먹을 만큼 컸던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창녕과 영산에 각각 현감을 두었는데, 창녕과 영산에 석빙고가 각각 남아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당시 창녕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때는 창녕을 영산 아래에 두기도 하였는데, 인조 9년(1631년)에 지도(至道)의 역변(逆變)으로 창녕현이 한때 영산현에 속하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영산이 지금처럼 창녕에 속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 1914년의 일로, 이때 영산은 창녕에 합병되어 창녕군의 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사랑채


이처럼 영산 땅은 만만치않은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그러니 오래된 한옥 하나쯤은 남아있을 법한 곳입니다.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곳이 바로 영산교리 신씨고가입니다. 아래위로 두 집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어, 편의상 신씨고가1과 신씨고가2로 나누어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집은 위쪽에 있는 것으로, 통상 신씨고가1로 부르는 곳입니다.

- 영산 신씨고가
사랑채 공간으로, 사랑채 오른쪽으로 비켜서면 안채로 들어가는 안대문이 있습니다.

이 집은 대대로 영산 신씨 일족이 살았던 곳으로, 아래쪽의 신씨고가2와 양식이 거의 비슷합니다. 이 두 신씨고가에서는 상류주택의 보수성과 민가의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부농주택의 한 전형을 엿볼 수 있으며, 이 집들은 19세기 중엽에 완성된 것으로 짐작되므로 벌써 백 년을 훨씬 더 넘긴 연륜을 지닌 셈입니다.

집은 크게 사랑채 영역과 안채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안채 영역에 안채와 곳간채가 있으며, 사랑채 영역에 사랑채, 문간채, 별채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안대문이 있습니다.
이 안대문은 여느 고가의 솟을대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신씨고가의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안대문은 마치 사랑채와 안채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분해두려는 듯 보입니다.
-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쪽문


사랑채와 안채를 이어주는 공식적인 통로인, 앞에서 말한 안대문과는 별도로 사랑채 왼편에 작은 쪽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쪽문은 아마도 바깥주인이 안채로 드나드는 전용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봅니다.
- 안채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집으로,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오른쪽으로부터 부엌 1칸, 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으로 되어 있고, 건넌방 1칸 앞의 마루는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청마루 뒤편에는 툇마루가 있습니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딸린 마당도 더 넓습니다. 이는 아마도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치를 수 있도록 보다 넓은 공간을 배려한 까닭이겠죠.
-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신정식 송덕비


신씨고가 입구 빈터 한쪽 곁에는 자그마한 비석 하나가 서 있어 눈길을 끕니다. 소박하기 그지 없는 이 비석에는 전 참봉 신정식 송덕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경오년 사월에 만들었다고 적혀 있으니 이 비석은 1930년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집은 한때 천석꾼의 집이었습니다.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소작하던 그 많은 논이 몰수되자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지금은 일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아무도 찾지 않는 집이 되었지만, 그전만 하더라도 영산 땅의 손꼽히는 부호집이었습니다.

이 송덕비에 적힌 신정식은 일제시대 살았던 집주인으로, 송덕비에 적힌 내용을 미루어볼 때 소작농과 과객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송덕비는 그런 베풂에 보답하는 의미로 소작농과 과객들이 십시일반 보태어 만든 것이었고요.

- 영산 신씨고가의 입구 모습


지금 영산 신씨고가는 소유권이 창녕군으로 넘어가 군청이 보수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덕분인지 신씨고가의 입구도 깔끔하게 단장되어 마치 새것처럼 되었지만 대신에 예전의 예스러운 느낌은 많이 없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틈 나는 대로 우리 문화유산을 찾아나서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삭막한 현대 도시생활에서 느끼기 어려운 동질감과 편안함을 그곳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보수할 때 우리에게 동질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이런 예스러움을 가능한 잃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