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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명 | | 한국 성악계의 '거목'으로 꼽히는 원로 성악가 오현명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가 24일 저녁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중국 만주에서 출생한 고인은 1948년 서울대 음대 성악과 졸업 후
교감, 한양대 음대 학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가곡 발전과 성악 교육에 힘써온 한국 성악계의 산증인이다. 1948년 한국 최초의
'라 트라비아타'에 출연한 이래 60여편의 오페라에 출연하고, 50여편의 오페라를 직접 연출한 그는 1964년부터 1982년까지 국립오페라단장을 맡는 등 오페라 발전에도 헌신했다. 특히 한국 가곡에 대한 남다른 애착으로 1960년대부터 한국 가곡만으로 독창회를 여는 등 '가곡 전도사'로서 역할을 든든히 해왔다. 유족으로는 아들 영인(오페라 연출가), 영석(
), 영진(성악가), 딸 순방씨(주부) 등 3남 1녀가 있다. 빈소는 행당동 한양대
이며, 발인은 27일 오전 8시. (02)2290-9442

양명문 명태

변훈
양명문 시 / 변훈 곡 / 오현명 노래
이 노래를 곧잘 부르던 형님이 있었다. 물론 이만큼 굵고 저음의 바리톤은 아니었지만 이노래는 술자리의 주목을 받기위해 충분하고도 남을 노래다. 한국적인 익살, 그리고 한숨이 섞여 있는 자조적이면서도 재치가 있는 노래 명태... 명태와 오현명씨의 인연을 어디선가 발췌해왔다.
吳鉉明씨가 한국 歌曲史 최고의 성악가로 뽑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생애 가 80년 한국 가곡사 혹은 民族史(민족사 )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만주땅 에서 출생한 그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 며 자라다 6세 때 현제명 성악곡집을 듣고 음악적 감화를 받았다. 형의 친구인 작곡 가 임원식씨로부터 목소리 좋다는 말을 듣 고 中 1때 교회 무대에 처음 섰고 「보리밭 」의 작곡가 윤용하가 만든 조선 합창단 단 원으로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징병을 당해 일본까지 끌려갔다가 거기서 조국해방을 맞이하였고, 만주로 되돌아가던 중 38선이 막혀 서울을 떠돌게 되었다. 그러다 극적 으로 현제명씨를 만났고 그 밑에서 일하다 가 경성음악학교 장학생으로 입학, 평생의 스승 김형로씨를 만났다. 6·25 때는 좌익 학생들에 의해 납북되던 중 탈출하여 국군 정훈음악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일생의 레퍼토리가 된 가곡 「명태」를 만났다. 『1951년 해군 정훈음악대에 있을 때, 연락 장교로 있던 작곡가 변훈씨가 날 위해 만들 었다며 던져주고 간 악보뭉치 속에 「명태 」가 있었지요. 멜로디보다 가사 위주로 가 는 생소한 방식, 해학적인 가사가 좋아 발 표했다가 당시엔 지독한 혹평을 받았어요. 작곡가가 낙담해 進路를 바꾸기까지 했으 니까요. 1970년에 다시 불렀다가 유명해져 서 어딜 가나 오현명 -명태, 명태 -오현명 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베이시스 오현명
한국가곡 - 명태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푸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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