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마을들 2012. 8. 17. 15:51

아침이슬 -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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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끈 노래

 

양희은 "아침이슬"(1971)은 노래의 기적을 대표한다

1971년 봄, 막 대학에 들어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여학생의 귀에 어떤 노래가 들어온다. 그 노래가 마음에 까지 들어오자 여햑생은 악보를 구하여 자신이 불러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노래를 1970년에 작곡한 청년은 악보를 이미 찢어버렸다. 하지만 찢어진 악보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구한 여학생은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어느날, 작곡한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된다. 이렇게 양희은이 "아침이슬"을 만났고, 김민기를 만났다.

"아침이슬"을 작게는 한국 대중음악에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싱어송라이터들 중 한 사람인 김민기와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될 가수 양희은을 만나게 했다.

양희은을 눈 여겨본 사람들 덕에 음반을 발표할수 있게 되자 곧 독집음반을 내게 될 김민기가 "아침이슬"을 양희은이 먼저 음반에 싣도록 배려했다. 녹음작업까지 도왔다. 그렇게 양희은은 데뷔앨범인 (고운 노래 모음)(1971)에 나왔고, "아침이슬"은 세상과 만난것이다. 포크의 시대라고는 해도 외국의 곡들을 번안하여 부르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던 때에 한국에 사는 젊은이들의 정신을 대변하는 노래의 등장이었다.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자기네 이야기를 노래로 직접 만들어 부르는 것이 남다른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대중가요에도 깊은 사유가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그런 노래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음악적으로 "아침이슬"은 노래하는 이의 음색과 성량이 안정된 상태로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음역대과 멜로디를 가지고 있다. 포크의 폼 안에 있지만 클래식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할 수 있는 화성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면서 대중 그 누구나 좋아할수 있고 기억할수 있는 고이다. 굳이 빗대어 말해야 한다면, 영국의 비틀스(The Beatles)의 "Yesterday"가 있고 한국에는 "아침이슬'이 있는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침이슬"의 이러한 가치를 알아보고 "국민에게 권할만한 건전가요"로 선정했다. 하지만 몇 해가 지나가 그들은 "아침이슬"의 또 다른 가치를 알아보았고 금지곡으로 묶어버렸다. 우습게도 군사정권이 이 노래의 서정성과 저항성이라는 두 개의 가치를 모두 알아본 셈이다. 그러나 음반을 사서, 혹은 방송을 통하여 이 노래를 듣지 못하게 할 수는 있어도 사람들의 입까지 막지는 못했다. 우울하면서 아름답고, 어두우면서 우아한 "아침이슬"은 이내 누군가의 방으로, 청년들의 화기애애한 모임으로 결의에 찬 표정으로 어깨동무를 한 학생들이 행진하는 교문 밖으로, 시대를 고민하고 아픔을 나누는 이들이 모인 거리까지 퍼져나갔다.

 

작곡한 김민기도 노래한 양희은도 작은 노래 하나가 자신들의 뜻을 넘어 세상에서 더 큰 생명력을 갖게 된 것에 놀랐다. 노래가 제 스스로 생명을 얻어간 것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아침이슬"은 70년대를 넘어 80년대에도, 90년대에도 불려졌다. 음반 대신 악보로 인쇄되었고, 사람의 입과 기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제 발로 찾아갔다. 이렇게 "아침이슬"은 청년의 조용한 노래에서 거리의 치열한 노래로, 그리고 시대의 묵직한 노래로 성장해간다. 새로운 정서와 기법으로 태어난 창작곡이 저항가요의 대표로 이름을 올리는 순간들이었다.

"아침이슬"은 세상을 바꾸는 데에 분명히 힘을 보탰다. 하지만 바귄 한국의 오늘은 20%의 일부가 세상의 부 70%을 가져가는 나라이다. 나머지 30%를 80%가 나누며 살아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치민주화를 우선시하는 사이에 경제민주화는 미뤄지다 못해 더 멀어져간다. 촘촘한 법망은 하루살이들은 다 잡아채면서도 멧돼지는 그냥 통과시켜버리고 있다. 그것이 한국의 법이다. 어떤 면에서 세상은 더 나쁘게 변했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사람을 바꾸는데에 분명히 힘을 보탰다. 그리고 노래의 기적을 보여줬다. 한 청년이 자신의 방에서 읊조리며 만든 노래 하나가 한 여인의 입으로 불려지고 다시 수천만 사람들의 입으로 옮겨지고, 무려 40년 동안이나 내내 불려졌다. 노래는 기적이다. "아침이슬"은 노래의 지걱을 대표한다(글. 나도원(100비트 한국 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및 장르분과장)

 

양희은(楊姬銀) 1952년8월13일생으로 대한민국의 가수다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고 사학과 1 학년때인 1971년에 대뷔하였다. 데뷔곡은 1집앨범(아침이슬)이다. 대표곡 "아침이슬"은 작사가 김민기는 당시 작사를 할때 민주화에 대한 열망같은 직접적인 내용은 담지 않았다고 했지만 당시의 대중은 시대상황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 의해 민주화에 어울린다고 해석해 이곡을 많이 불렀고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곡이 되었다.

 

김민기의 곡들은 당시 방송이 금지된 곡들이 많았는데 이는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등의 독재정권을 거치며 민주화운동에서 "아침이슬"을 비롯한 양희은의 곡들이 많이 불렀기 때문이다. 양희은의 곡 중 약 30여곡이상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그중에서 "아침이슬"은 1973년 정부가 선정한 건전가용에 선정되었다. 그 다음해인 1974년에 가사 중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부분이 대한민국의 적화(赤化)를 암시한다며 금지곡이 돼버린 웃지 못할 일도 있었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수 없냐며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작은연못"은 금지곡으로 지정됐으나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가사 내용인"작은연못에 살던 붕어 두마리가 싸우다 한마리가 죽어 물이 썩어 결국엔 모두가 죽었다"라는 가사가 남한과 북한, 당시의 대권 라이벌이었던 박정희와 김대중, 권력암투의 주인공이었던, 김종필과 이후락등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이런 양희은의 금지곡들은 1987년 6.29선언 직후 대부분 해금(解禁)되엇고 1980년대 이후에는 음반활동과 더불어 방송활동도 하고 있다.

1971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 청계천에서 김민기의 "아침이슬" 음반을 사려고 다녔지만 구할수가 없었다. 그당시 방송금지뿐만아니라 판매금지된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10만원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당시 한달봉급이 2만5천원인데...그래도 구할수가 없던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듣고 싶어서 청계천 음반도매상을 다닌적이 있었습니다.

 

친구 권오상이가 어느날 "아침이슬"을 부르는데 목소리가 우렁찬 소리로 시원하게 부르는 모습이 마치도 곰이 산에서 표호하듯이 부르는 모습이었는데..목소리가 양희은과 같이 시원스럽게 부르는 모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보고싶다..권오상아...!!

 

양희은이가 명동의 OB캐빈에서 노래를 부를때 어떤때는 동생 양희경이 대신해서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불렀는데 OB캐빈의 내부가 컴컴하여 동생이 대타를 불렀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너무 목소리가 똑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