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마을들 2012. 8. 8. 00:29


 

윤미진 3집 'Fly my song'

 

- 안석희(대중음악평론가)

 

윤미진 3집을 들으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두 여주인공을 떠올린다. 적지 않은 생의 굴곡을 겪은 호텔 아드리아나의 사장 지나와 한창 피어오르는 젊은 엔지니어 피오. 돼지 포르코를 사이에 두고 만난,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을 가진 두 여자 사이에 생겨나는 자매애가 이 <붉은 돼지>의 숨은 주제라고 말하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연륜과 성숙함을 보여주는 지나와 소녀에서 이제 막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하는 피오. 지나와 피오 사이에 윤미진이 있다.

 

 

이번 3집 《Fly my song》은 싱어송라이터 윤미진의 또 다른 성장기이며 길 찾기다. ‘조국과 청춘’, ‘꽃다지’ 노래운동의 대표적인 팀을 거쳐 1999년에 1집 《착한 노래》를 내며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걸어온 윤미진은 매 앨범마다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쉽지 않은 여정을 해왔다. 그 시기 사회 진보적인 이슈와 민중들의 삶을 다루며 쉽게 사람들과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민중가요의 한 지향이라 볼 때 이 지향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잔뼈가 굵은 창작자가 독자적인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기란 쉽지 않다.

 

 

예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솔로로 독립한 안치환이 3집 음반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스타일을 찾은 것처럼 팀에 소속된 한 구성원에서 개인으로 자신의 개성을 확립하는 일종의 길찾기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윤미진의 세 번째 길찾기는 이런 강력한 자장을 뚫고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하는 모색의 의미 있는 결과물이다.

 

 

1집과 2집의 곡을 다시 편곡한 3곡과 널리 알려진 <민주>의 리메이크를 합해 총 12곡이 실려 있는 이 음반은 예전처럼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가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노래들 사이에 균형이 부족한 느낌을 주었던 지난 1집과 2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이번 음반에서 가장 인상적인 트랙인 <인간과 꽃신>에서 윤미진의 지나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과 꽃신 - 윤미진

 

워킹 베이스와 전형적인 재즈 피아노가 캬바레 뮤직의 분위기를 만드는 이 곡은 같은 <조국과 청춘> 출신이면서 재즈 아카데미를 거쳐 세션 및 편곡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현정의 솜씨 있는 조율과 또 한사람의 공동 편곡자인 조윤섭의 일렉 기타 솔로가 더해지며 빛을 발한다. 이 든든한 두 조력자를 뒤로 하고 우아한 드레스 차림으로 테이블 사이를 부드럽게 유영하며 인생의 덧? 坪습?노래하는 윤미진의 지나가 있다. 절도 있는 왈츠 리듬에 실린 또 다른 트랙 <영웅> 역시 이런 분위기를 진하게 풍겨주는 데 <인간과 꽃신>과 조금 다른 점이라면 윤미진의 지나와 피오의 이중창에 가깝다는 점이라고 할까.

 

 

영웅 - 윤미진

 

나는 이 스타일이 윤미진이 앞으로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음악적 방향의 하나라고 본다. 윤미진이 보컬리스트로 가지고 있는 특징의 하나인 중저음과 고음의 분위기가 상이한 모습도 이 스타일 속에서는 매력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많다. 윤미진의 결 고운 고음과 나직하며 호소력 있는 저음 모두 상생하는 조화가 가능하다. 이번 음반에서 고음의 볼륨감이 필요한 몇몇 곡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이런 스타일을 취하며 커버되지 않을까.

 

▲ 윤미진은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에서 연륜과 성숙함을 보여주는 '지나'와 소녀에서 이제 막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하는 '피오'사이 중간 어느 지점에 서 있다.
 
다만 이들 노래가 자신을 말하기 위한 스타일이 아니라 타자를 말하기 위한 - 풍자와 비판을 위한 스타일이 된 점이 아쉽다. 본래 캬바레 음악 스타일이 가지고 있는 특징인 센티멘털리즘이나 에로티시즘은 민중가요의 순정적인 태도와 긍정적인 세계관과 심하게 충돌한다. 때문에 퇴폐의 음영이 슬쩍슬쩍 어른거리는 이 스타일에 자신을 실어 노래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허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반드시 희망과 긍정으로 채워지는 게 아님을 생각해보면 이런 스타일의 가능성은 외려 더 넓을 수도 있다. 처연함도 때론 하나의 위로가 되고 인생의 덧없음도 한 꺼풀 벗기고 나면 온몸으로 겪은 인생의 뼈아픈 진실을 이해하며 배우는 일 아닌가.  

 

 

이 순간, 이번 음반에 리메이크되어 실린 <민주>의 작곡자이자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안혜경이 살짝 떠오르는 건 아마도 클래식 전공자로 시작해서 밴드 마고를 통해 록을 거쳐 최근 라틴 음악 요소를 적극 수용하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한 안혜경의 경험이 윤미진이 지금 가고 있는 길과 많이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선 이의 성과를 딛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선택해온 최선의 방법이다. 

 

 

이처럼 팀에서 활동하다가 개인 가수로 독립한 가수들이 멈추지 않고 계속 성과를 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얼마 전 신작을 더블 음반으로 내는 무모함(?)을 감행한 노래마을 출신의 이지상과 대구 '좋은 친구들' 출신으로 주로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2집 음반을 낸 지민주가 그렇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문진오, 꽃다지의 서기상, 박향미 노래마을의 손병휘 등을 모두 하나의 군으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팀 활동 속에서 얻은 자산과 부채를 모두 온진히 껴안고 자신의 길을 내는 이 모색들이 모여 민중가요의 허리를 튼튼히 하게 될 것이다.

 

 

이름 - 윤미진

 

다시 <붉은 돼지>의 두 여인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운영하는 호텔 바에서 인생의 비애를 노래하는 가수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쟁으로 겪은 개인의 아픔을 레지스탕스의 비밀 연락원으로 승화시키며 포르코와 커티스 그리고 미워할 수 없는 공적(空賊)들을 둘러싼 모든 소동을 일거에 정리해버리는 여장부 지나의 모습이 있다. 밝은 에너지로 모두를 끌어들여 누구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며 거침없이 의견을 드러내고 열정적으로 엔지니어로 실력을 쌓아나가는 피오의 모습이 있다. <이름>을 들으며 윤미진의 지나와 피오가 부드럽게 손을 잡는 모습을 본다. 여성들만으로 기운차게 돌아가던 비행정 수리공장이 슬그머니 오버랩 된다. 이제 윤미진의 노래가 날아갈 차례다.